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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디스 창고/문학

[내 인생의 책 10 권] 2. 알랭 드 보통 - 동물원에 가기



동물원에 가기 (양장본)

저자
알랭 드 보통 지음
출판사
이레 | 2006-08-14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일상 속에서 느낀 철학적 단상을 특유의 해학을 들려주는 책!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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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슬프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지는 않는다."


이 첫 문장을 읽자마자 '이 책은 갖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다보면 읽고 싶은 책과 갖고 싶은 책이 나뉜다. 소개팅 상대로 비유해 전자가 '음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마음에 드는데' 식의 호감 정도라면 후자는 뒤에서 후광이 나며 모든 것이 완벽해지고 '바로 이 사람이야!' 라는 느낌의 이상형에 가깝다. 알랭 드 보통의 <동물원에 가기>는 이상형 같은 책이었다. 펭귄 출판사가 창립 70주년을 맞아 출간한 문인 70명의 작품들을 뽑아 만든 선집 중 하나인데 다른 책보다 이 책이 특히 갖고 싶었던 것은 단연 저 첫 문장 탓이다. 읽는 순간 호퍼의 그림을 떠올리면서 나도 모르게 반해버렸다.


알랭 드 보통은 내가 좋아하는 모든 분야를 다룬다. 현대인의 모습, 연애 얘기는 그의 소설 핵심 주제 중 하나다. 그림과 예술, 여행 관련 에세이를 펴내기도 했고 정이현과 같이 프로젝트 식으로 동명의 소설을 쓰기도 했다. 물론 나도 뻔하디 뻔한 스물 몇 살의 여자아이라서인지 가장 먼저 시작한 보통의 책은 유명한 <우리는 사랑일까>였다. 연애 얘기를 다루고 있지만 여기에 삶에 대한 통찰이 더해져 정말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로 <너를 사랑한다는 건>,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여행의 기술>, <불안>,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이건 아직 못 끝냈다) 정도를 읽었다.


보통 연애 얘기를 다루면 가벼워보인다는 인상을 주기 쉽다. 정이현이 문단에서 크게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거다. 실제로 나만해도 연애로 치덕치덕대는 우리나라 드라마가 지루하다느니 뻔하다느니 온갖 비난을 퍼붓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실 연애와 사랑은 세상의 핵심이다. 보통이 언급한대로 동물로서의 원초적인 본능인 '짝짓기' 과정의 진화된 일부이기도 하고 어찌되었든 많은 사람들의 삶 속 핵심 언저리에 자리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감정'이 가장 많이 요동치는 시기도, 바로 연애를 할 때다. 냉철하고 이성적으로 보이는 재벌, 기업가들이나 외국의 대통령, 총리들도 연애라는 감정놀이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들의 연애사는 언제나 신문을 장식하고 도마에 오른다.


책을 덮고 나서 허겁지겁 인터넷을 켜서 책을 검색했던 기억이 난다. 이 표지의 책은 절판돼서 더이상 찍지 않고 다른 판으로 나오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알라딘을 뒤져 중고책을 찾아 단숨에 결제했다. 얼른 받아보고 싶은 마음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그 책은 지금 내 옆에 있다.


보통의 글에 호감을 느끼는 것을 넘어 좋아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관심이 연애의 문제에만 머무르지는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의 다른 책들을 보면 예술, 종교, 또 현대인들의 삶 자체에 대한 그의 통찰력 또한 돋보인다. 연애는 세상을 차지하고 있는 한 부분일 뿐이다. 책을 읽다보면 그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삶의 핵심이라든가 본질을 꿰뚫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의 많은 책 중에서 이 책을 고른 것은 첫째가 책의 첫 문장 때문이고 둘째는 그 엮음이 너무나도 이상형 스러웠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일'이 갖는 의미를 써내린 글부터 웨이터에게 버터를 주문하는 모습에 반해 사랑에 빠지는 한 남자의 이야기, 진정성에 대한 이야기, 따분함이 갖는 의미, 글쓰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단상.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엮어놓은 이상형의 남정네를 만난 기분이었다. 삶이 주는 소소한 것에 반할 줄 알고, 그럼에도 큰 사회와 그 사회 속에서 의미를 잃어가는 현대인들을 볼 수 있으며, 호퍼가 그리는 외로움을 글로 써내려 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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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할 점이 있다면, 나는 책을 읽고 나서 '호퍼적이다'라는 단어에 매료됐었다. '이거 참 호퍼적인데', '호퍼적인 느낌이 나는 식당이다' 하는 식의. 예전의 나는 호퍼의 그림을 보면 차가움, 외로움, 쓸쓸함 밖에 느끼질 못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난 뒤 감정의 폭이 넓어졌다. 좋은 글이란 정말 마치 앞트임 성형하듯 내 눈을 틔우고 감정의 깊이를 넓인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오늘 오전, 도농역에서 사망사고가 있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가려고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열차가 플랫폼에 오기 전에 멈췄다. 사람이 깔렸다고 했다. 아직 죽지는 않았다고 모여든 사람들이 웅성댔다. 당시 옆에 서 있던 어른이 역무원을 붙들고 열차가 언제 출발하느냐고 다그치듯 물었다. 역무원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며 그 사람을 내치고 달려갔다. 한 문장짜리 질문에 심장이 차가워졌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그 때 아마 나는 호퍼의 그림을 떠올렸던 것 같다.


그리고는 집에 와 '보통이 말한 호퍼의 그림은 그런 게 아니었는데' 하면서 책을 다시 펴보게 되었다. "호퍼의 작품은 잠시 지나치는 곳과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마치 우리 자신 내부의 어떤 중요한 곳, 고요하고 슬픈 곳, 진지하고 진정한 곳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것이 호퍼 그림의 묘한 특징이다. 그의 작품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기억하는 것을 돕는다." 인터넷으로 그림을 검색해 보며 다시 한 번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호퍼의 그림은 슬프고, 가끔 우리의 모습과 너무 똑같아서 우리를 슬프게 한다.






p.62.

21. 우리는 계획보다는 우연에 의해 목표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실증주의와 합리주의 정신에 심취한 유혹자, 세심하게 과학적 연구를 하면 사랑에 빠지는 법칙을 발견할 수도 있다고 믿는 유혹자에게는 기운 빠지는 이야기다. 유혹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옴짝달싹 못하게 붙들어맬 사랑의 올무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일을 진행한다. 예를 들어 어떤 웃음, 의견, 포크를 쥐는 방식 같은 것...... 그러나 불행하게도, 설사 사람마다 꼼짝 못하는 사랑의 올무가 존재한다 해도, 유혹 과정에서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계산이라기보다는 우연에 의해서다. 사실 클로이가 어떤 행동을 했기에 내가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 나의 사랑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Being and Time>의 평가에서 그녀가 나와 생각이 같다는 사실만큼이나 그녀가 웨이터에게 버터를 주문하는 모습이 귀엽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었다.


p.98.

사람은 아주 하찮은 것으로도 사랑에 빠질 수 있다. 뭐 사랑이라는 말이 좀 그렇다면, 기질에 따라서는 반한 상태, 병, 착각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다른 사람을 향하여 뜨겁게 고조된 그런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p.123.

마치 사람 발과 구름만 나오는 홈비디오를 보는 것 같다. 관객은 어리벙벙하여 도대체 눈높이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궁금증을 느끼게 된다.


많은 글쓰기가 그런 식이다. 맞춤법은 시간이 가면 정확해지지만, 우리의 의도를 제대로 반영하도록 단어들을 배열하는 데는 꽤 힘든 노력이 필요하다. 글로 쓴 이야기는 보통 사건의 거죽만 훑고 간다. 석양을 본 뒤, 나중에 일기를 쓸 때는 뭔가 적당한 것을 더듬더듬 찾아보다가 그냥 '아름다웠다'고만 적는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그 이상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글로 고정해놓을 수가 없어 곧 잊고 만다. 우리는 오늘 일어났던 일들을 붙들어두고 싶어 한다. 그래서 어디에 갔고 무엇을 보았는지 목록을 작성한다. 그러나 다 적고 펜을 내려놓을 때면 우리가 묘사하지 못한 것, 덧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사라져버린 것이 하루의 진실의 열쇠를 쥐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삶을 붙잡아두는 데에는 감각 경험을 충실하게 기록하는 것 이상이 필요하다. 우리가 보는 것을 나열한 자료는 예술이 되지 못한다. 오직 선별을 할 때에만, 선택과 생각이 적용될 때에만 사물들이 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