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되는 느낌. 한문장 한문장이 고급지다.
정말 좋은 책이다.
시집을 제외하면 올해 들어 처음 읽은 책인데, 이 책처럼 한 해를 살아내야지.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5117.html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5678.html
p. 42.
사람과 사람이 만나 받침의 모서리가 닿으면 그것이 사랑일 것이다. 사각이 원이 되는 기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말을 좀 들어야 한다. 네 말이 내 모서리를 갉아먹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너의 사연을 먼저 수락하지 않고서는 내가 네게로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서정시가 세상과 연애하는 방식이 또한 그러할 것이다. 내 말을 하기 전에 먼저 너의 사연을 받아 안지 않으면 내 말이 둥글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일 것이다. 손택수는 문태준과 더불어 1970년대산 서정시의 젊은 본령이다. 방심한 자가 뜨는 사랑의 눈 덕분에 얻은 성취라고 믿는다.
p.54.
-진은영- "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 죽을 때까지 기억난다" (<서른 살>)는 식의 발성은 확실히 최승자의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삼십세>)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데가 있다. 더 깊이 앓는 몸과 더 깊이 사유하는 머리가 최승자 이후에 없지 않았으나 그 둘의 뜨거운 합선은 이후에도 드물었다.
p.80.
-이시영-
달라이 라마께서 인도의 다람살라에서 중국의 한 감옥에서 풀려난 티베트 승려를 친견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심했느냐는 물음에 승려가 잔잔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고 한다. '하마터면 저들을 미워할 뻔했습니다그려!' 그러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승려의 두 손이 가만히 떨렸다. -<친견> 전문
시모니데스의 경외다. 내가 울컥했던 것은 승려의 말 때문이 아니라 그 뒤에 어김없이 떨렸던 그의 두 손 때문이다. 이 순간 인간은 인간적이어서 얼마나 숭고한 것인가.
이것은 백 편이 넘는 시 중에 고작 두 편일 뿐이다. 사진작가 로버트 카파는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p.85.
실연의 아픔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사내에게 그의 친구가 이렇게 위로한다. "이봐, 그 여자 말고도 세상에 여자는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이걸 위로라고 하고 있다. 사내가 잃어버린 것은 '이 여자'다. 포인트는 '여자'가 아니라 '이'에 있는 것이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어떤 다른 '한' 여자도 사내의 '이' 여자를 대체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위로는 허름하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결국은 그렇게밖에는 위로할 수가 없다. 유일무이한 '이 여자'가 세상에 얼마든지 있는 '한 여자'로 전락할 때 고통은 사라진다. 철학자들이라면 단독성('이 여자')이 특수성('한 여자'으로 바뀔 때 실연은 극복된다, 라고 정리할 것이다. 대개는 그리되게 돼 있다. 그 사내, 조만간 또다른 '이 여자'와 나타나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여자'를 만나기 위해 그동안 미망 속을 헤맸노라고. 세상에 여자는 얼마든지 있다는 말, 결국은 맞는 말이 되고 만다.
p.95.
시절은 가을, 너절한 슬픔들의 침투에 심신이 허약해지는 계절이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인가. 하마 나는 너를 잊었다. 그리고 이제는 너를 잃은 슬픔까지도 다 잊었다. 그런데 왜 즐겁지가 않은가. 뭔가 한 뼘 더 타락한 듯도 하고 영혼의 뱃살이 늘어난 듯도 한 이 기분은 뭔가. 슬픔이 유통 기한을 넘기면 씁쓸함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인생이라는 거, 씹어 먹으면 아마도 이런 맛이겠지.
p.101.
그 자신 누구보다 담즙과 토성의 사람이었던 벤야민은 이런 문장을 남겼다. "어떤 사람을 아는 사람은 희망 없이 그를 사랑하는 사람뿐이다."(<일방통행로>) 비애와 더불어 사는 삶이 어쩌면 이런 것일까. 그래서 이렇게 바꿔 적는다. 삶을 아는 사람은 희망 없이 삶을 사랑하는 사람뿐이다.
p.107.
사랑에 빠지면 탐정이 된다. 왜? 나의 연인이 끊임없이 내가 해독해야 할 '기호'들을 방출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미묘하게 흔들리는 눈빛, 평소와는 다른 어색한 미소, 어쩐지 나를 밀어내는 듯한 말투. 젠장, 도대체 이 기호들은 뭘 뜻하는 거야!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우리가 연인이 방출하는 기호 앞에서 안달하는 이유는 그것이 어떤 '가능 세계'의 존재를, 즉 내가 모르는, 그러나 있을 가능성이 농후한 어떤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그 무슨 추억 따위를 늘어놓은 책이 아니라 한 남자가 평생 동안 '기호'를 해독해나가는 이야기라는 것. 내가 모르는 그녀만의 세계가 있다고? 그런 거, 인정하고 싶지 않다.
p.122
어떤 이들은 슬픈 삶을 한없이 슬픈 눈으로만 들여다보아서 기어이 영영 슬픈 삶으로 만들어버리기 쉬워서다. 사회적 약자를 재현하는 일은 그렇게 얼벼다. 시의 의식이 동정의 눈물을 흘릴 때 시의 무의식이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사태를 힘껏 막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는 어떤가. "좋겠다, 죽어서..."라는 아픈 말을 모질게도 옮겨놓았고,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시를 마무리했다. 이 덤덤한 듯 원숙한 기교 아래로 사무치는 진심이 흐른다. 시인이 끝내 절제한 그 문장을 경박한 내가 대신 써야겠다. "세상의 모든 정은씨, 살아서, 꼭 살아서 행복하십시오."
p.151.
한국 대중음악 노랫말의 역사에서 1980년대 후반 '동아기획' 사단 뮤지션들의 작품은 중요한 분기점이 될 것이다. 이들의 투명한 구어체 가사는 가요 가사 특유의 클리셰들을 몰아내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예컨대 지금은 전설이 된 팀 '어떤날'의 노랫말들은 대표적인 사례다. 물론 이병우가 "제법 붙은 뱃살과 번쩍이는 망토로 누런 이를 쑤시는 나의 고향 서울"(<취중독백>,1989)처럼 쓰라린 문장들도 써내긴 했지만, 이 팀의 감수성은 대개 서정적이었다. 조동익이 훗날 솔로로 발표한 <엄마와 성당에<(1994)가 도달한 예술성은 그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1990년대 초,중반은 박주연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0년대에 이영훈, 유재하 등이 있긴 했지만 한국 발라드 노랫말의 표준 문법은 그녀가 만들었다. 울고불고 헤어지는 데서 끝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그녀는 다시 돌아오는 자의 복잡한 내면까지 묘사했고 '다음 세상'에서 꼭 다시 만나자는 식의 집요한 격정까지 그렸다. 조용필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김민우의 <타버린 나무>, 김규민의 <옛이야기> 등이 특히 훌륭했다. 이후 등장한 신해철과 서태지의 역할도 컸다. 엘리트의 철학적 독설, 자퇴자의 비판적 육성이 그들의 무기였다. 1990년대 중반에 등장한 이적의 독특한 서사 충동도 기억해둘 만하다. <그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에 관하여>(2집, 1996)를 들어보면 그가 훗날 왜 소설을 썼는지 이해가 된다.
2000년대 이후 내가 가장 편애하는 작사가는 이소라와 박창학이다. 이소라는 흔한 소재들을 평범하고 순한 단어들로 노래할 뿐인데도 어떤 히스테릭한 깊이에 도달하곤 한다. 그의 노랫말에 은은히 흐르는 리듬감은 특히 일품이다. 그는 아마도 발라드 장르에서 각운을 배려하는 거의 유일한 작사가일 것이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 /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바람이 분다>, 2004) 마지막 세 문장은 정곡을 찌르면서 빈틈없는 보폭으로 걸어간다.
윤상의 모든 음악에 노랫말을 붙이고 있는 박창학은 국어 교사 출신답게 정확한 문장을 구사해서 우선 미덥다. 그가 <근심가>나 <백투 더 리얼 라이프> 등에서처럼 정색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려 할 때 그의 노랫말은 어딘가 어색해지지만, "이젠 출발이라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 한낮의 햇빛이 커튼 없는 창가에 눈부신 어느 늦은 오후/ 텅 빈 방 안에 가득한 추억들을 세어보고 있지 우두커니/ 전부 가져가기에는 너무 무거운 너의 기억들을 혹시 조금 남겨두더라도 나를 용서해" (<이사>, 2002)에서처럼 힘 빼고 겸손하게 감정의 기미들을 포착할 떄 그의 노랫말은 아늑한 관조의 미학 같은 것을 품는다.
최근의 사례로 단연 인상적인 것은 '루시드폴'과 '언니네 이발관'의 근작들이다. "날개, 내 손끝에 닿지 않는 곳, 작은 날개가 생겼네./시간, 모질게도 단련시키던. 우리 날개가 되었네." (<날개>, 2007) 루시드폴의 노랫말은 시적이라기보다는 그냥 시다. 그의 서정성은 당대의 시인들과 경쟁한다. "당신을 애처로이 떠나보내고/ 그대의 별에선 연락이 온 지 너무 오래되었지/ 너는 내가 흘린 만큼의 눈물/ 나는 네가 웃은 만큼의 웃음/ 무슨 서운하긴, 다 길따라 가기 바련이지만" (<가장 보통의 존재>, 2008) 언니네 이발관의 독특한 감성이야 이미 유명하거니와, 이 노래는 제목부터가 이미 시적이다. 어색한 듯 결합된 세 어절이 만들어내는 이 쓸쓸한 뉘앙스. 길게 말할 여유가 없어 아쉽다. 백문이 불여일청.
p.162.
그래서 어리석고 마음 약한 우리는 올해도 크리스마스 때문에 살짝 홍역을 치렀던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왜 하필 연말에 있어 마치 9회 말 2사 만루 타석에 들어선 타자의 심정이 되게 하는 것인가 말이다. 그냥 이렇게 생각해버리자. 나만 내야 땅볼을 친 게 아니라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메리 크리스마스'는 9회 말 2사 만루 홈런만큼이나 드문 일이라고.
p.164.
-신경민 앵커의 클로징 멘트-
시를 읽는 일이 한가롭다는 생각 때문에 용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좋은 시는 절박하고 또 정치적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랑시에르는 정치와 예술이 '근본적으로' 연동돼 있다고 주장한다. 보이지 않는 거소가 들리지 않는 것을 보이고 들리게 만드는 것이 예술이라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았던 존재들이 나타나서 그간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로 무언가를 주장할 떄 시작되는 것이 정치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니 '보이고 들리는 것'들을 둘러싼 완강한 질서를 재조직한다는 측면에서 예술과 정치는 하나다. 그렇다 해도 새해 벽두에 가장 참혹하고 치명적인 시는 시집이 아니라 용산에 있었다. 그래서 시가 아니지만 시이기도 한 문장들을 읽는다.
"용산의 아침 작전은 서둘러 무리했고, 소방차 한 대 없이 무대비였습니다. 시너에 대한 정보 준비도 없어 무지하고, 좁은 데 병력을 밀어넣어 무모했습니다. 용산에서 벌어진 컨테이너형 트로이 목마는 목표에만 쫓긴 나머지 실행 프로그램이 없었고, 특히 철거민이건 경찰이건 사람이라는 요소가 송두리쨰 빠져 있었습니다." (문화방송 <뉴스데스크>, 2009년 1월 20일, 클로징 멘트)
신경민 앵커가 직접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멘트를 옮겨 적었다. 나는 이 문장들에서 시를 봤다. 맨 앞의 두 문장은 거의 비문이라고 해도 될 만큼 문법적으로 위태롭다. 그러나 이 위태로움 속에는 어떤 에너지가 있어서 흠을 잡을 수가 없다. 이 두 뭅장을 실어 나르는 팽팽한 대구법에서는 분노를 다스리기 위한 안간힘 같은 게 느껴진다. "말을 한다는 것은 총을 쏜다는 것이다"라고 사르트르는 말한 적이 있거니와, '무리' '무대비' '무지' '무모'로 이어지는 네 단어는네 발의 총성처럼 들린다.
p.167.
내게 주어진 일이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니까 열심히 할 뿐이다, 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매력 없다. '왜 그 일을 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 잘 정리된 몇 문장의 대답을 머뭇거림 없이 꺼내놓는 사람이 프로라고 생각한다.
p.222.
왜 사랑에 빠지는가. "물이 없어도 표류하고 싶어서"다. 위험하고 싶어서, 살아 있음을 느끼고 싶어서, 문제를 만들고 싶어서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지금과는 '다른 나'의 가능성에 빠진다는 것이다. 미래의 가능성 없이 어떻게 현재를 견디나. 살고 싶은 욕망이 불가피하듯 사랑은 불가피하다. 그래서 이 시인은 이렇게 단호하다. "콩밥을 나누고 에이즈 환자 모임에 가야 한다 해도/ 사랑한다면 사랑할 수밖에.".. 이 시의 수학은 이렇다. 사랑을 하면서 나는 '다른 나'로 분화된다. 미지의 너를 만나면서 나는 두 사람이 된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그래서 셋이다. 물론 이 계산이 안 맞는 경우가 더 많다.
p.231.
대개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것은 피해자의 얼굴이 아니라 가해자의 얼굴이다. 용산에서 여섯 명이 죽었지만 그들의 얼굴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대다수가 강호순의 얼굴은 공개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얼굴 공개로 얻게 되는 '공익'의 실체는 불분명하다. 그가 향후 지속적으로 공중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칠 공인이 아니기 때문에 '알 권리' 운운도 설득력이 없다. 징벌의 차원에서 얼굴을 공개하자는 논리는 법치주의에 위배될 뿐 아니라 살인자의 가족에게는 연좌제의 굴레가 될 수 있어 위험하다. 유사 범죄 예방 운운은 추단과 바람일 뿐이어서 '무죄 추정의 원칙'이라는 성문법을 훼손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피해자의 인권이 문제가 된다면 살인자의 얼굴을 유족들에게만 제한적으로 공개할 수 있겠지만 본래 인권이란 서로 주고 뺏는 것이 아니라 함께 수호되어야 하는 것이어서 저 논리는 감상적이다. 예외를 허용하면 우너칙은 파괴된다. 살인자가 아니라 인권 그 자체를 보호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연쇄살인자의 얼굴은 전쟁터가 되었고 그 전쟁에서 우리는 졌다.
p.241.
민주주의는 어떠한 종류의 의견 표명도 기꺼이 포용하지만 민주주의 그 자체를 위협하는 발언들까지 껴안을 수는 없다. 민주주의의 한계를 시험하지 마라. 문제는 좌편향이냐 우편향이냐가 아니라 상식이냐 몰상식이냐다.
4.19 관련 단체들의 울분은 그래서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다는 것과 허용될 수 있다는 것은 다르다. 이 나라 민주주의의 첫출발이었던 4.19 세대들이 언어를 포기하고 힘에 의존한 것은 비극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4.19를 기리고 싶었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언어와 민주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를 고수했어야 했다. 이를테면 이런 종류의 교과서를 실력 저지하지 않고 언어에 기대 비판하는 것이야ㅐ말로 4.19 정신인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손쉽게도 폭ㄹ겨에 의존함으로써 스스로를 부정하는 행위를 저질렀다. 그렇다면 4.19의 정신을 훼손한 것은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당신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 사상 때문에 탄압받게 된다면 당신의 편에 서서 싸울 것이다." 숱하게 인용되고 있는 볼테르의 말이다. 이 말을 다시 인용하는 우리의 심정은 참담하다. 당연한 상식이 되어야 할 이 말이 우리에게는 여전히 도달해야 할 미래인 것인가. 한때 민주주의는 '교과서 포럼'이 산업화의 기수라 찬양하는 바로 그 대통령에 의해 살해되었다. 피흘리며 죽어간 민중들 덕분에 민주주의는 살아났으나, 오늘날 그것은 여전히 얻어맞고 있다. 교과서 포럼과 4.19 관련 단체들은 결국 같은 일을 한 것이다. 민주주의를 때리지 마라.
p.247.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우리는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박종철의 죽음이 앞에 있었고, 이한열의 죽음이 뒤에 있었다. 그들은 이십대를 갓 넘긴 청년들이었다.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최근 이뤄진 한 설문 조사에서 서울 지역 4개 대학 대학생의 절반 이상은 '6월 항쟁'을 모른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다가올 대선에서 독재 정권의 역사의식을 잇는 야당 유력 후보에 한 표를 던질 것이다. 그 선택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박종철과 이한열의 이름을 모르는 채로 이루어진 선택은 존중받을 가치가 없다. 그것은 정치적 무뇌아 혹은 윤리적 백치의 선택이다. 우리에게는 그들을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아니다. 우리에게는 그들을 잊을 권리가 없다. 박종철의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에게 부친은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이 못돼서 죽었소. 똑똑하면 다 못된 것 아니오?" 이 반어에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다. 똑똑하지만 너무 착한 우리들에게도 20년 전의 그 6월이 온다.
p.354.
먼저 쉽표. 소설가 에번 코넬은 단편소설의 초고를 읽어내려가면서 쉼표를 하나하나 지웠다가 다시 한번 읽으면서 쉼표를 원래 있던 자리에 되살려놓는 과정을 거치면 단편 하나가 완성된다고 했단다. 강박증 환자처럼 보이지만 실은 치열한 문장가가 아닌가. 불필요한 곳 혹은 엉뚱한 곳에 나태하게 찍혀 있는 쉼표는 글의 논리와 리듬을 망쳐놓는다. 쉼표는 전혀 사용하지 않거나 아주 많이 사용해야 한다. 쉼표를 사용할 필요가 없는 천의무봉의 문장을 쓰거나 쉼표의 앞뒤를 섬세하게 짚게 하는 치밀한 문장을 만들어야 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렇게 적었다. "아마추어는 말줄임표를 마치 통행 허가증처럼 사용한다. 경찰의 허가를 받고 혁명을 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말줄임표는 겸손함이 아니라 소심함의 기호다. 마침표에 대해서는 긴 말이 필요 없다. 담배는 백해무익이요, 마침표는 다다익선이다. 많이 찍을수록 경쾌한 단문이 생산된다. 이사크 바벨은 이렇게 썼다. "어떠한 무쇠라 할지라도 제자리에 찍힌 마침표만큼이나 강력한 힘으로 심장을 관통할 수는 없다."
p.292.
설렘.
"뼈와 뼈 사이에 내리는 첫눈"
애틋함.
"뼈와 뼈 사이에 내린 첫눈이 녹아내릴까봐 안타까워 하는 것"
참혹.
"뼈와 뼈 사이에 내린 폭우로 인한 참사"
p.이창동의 ㅡ<시>와 <밀양>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739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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