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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디스 창고/문학

[오르한 파묵] 이스탄불



이스탄불 : 도시 그리고 추억

저자
오르한 파묵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08-05-09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이 그리는 이스탄불과 추억 이...
가격비교


아. 번역투라 읽기 힘든건지 아니면 내용 자체가 읽기 힘든건지.

3시간동안 뭐하지...... 뭘쓰지...뭘 쓰고 나오지.......망했땅!




p.117.

항상 같은 아파트에서, 같은 방에서, 같은 구역에서 살았음에도 나중에야 진짜 가족이 그러하다고 믿었던 것처럼, 몇몇 사소한 것을 제외하고는 항상 비슷한 것들을 먹고 이야기하는 삶을 살았지만(반복은 행복의 원천이자 보증이자 죽음이다!) 항상 어디에서 나타날지 전혀 몰랐던 이 '사라지는' 것들은, 내 가슴을 아프게 하기보다는 평범한 삶, 지루한 순간과 일상에서 나를 데리고 가서(마치 어머니의 화장대 거울처럼) 갑자기 나를 다른 세계로 이끌고 가는 신나고, 경이로우며, 독을 품은 꽃 같았다. 내 영혼의 어두운 부분에 호소하고, 나의 기분을 전환시키고, 나의 존재와 잊고 싶었던 외로움을 더욱더 깊게 느끼게 했던 이 '사라지는' 순간, 가족의 재앙, 다툼에도 나는 별로 눈물 흘리지 않았다.


p.132.

비애의 기본적 원천이 '절망적인 열정'(black passion)으로 간주되고, '멜랑콜리'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어원이(melania kole, 검은 쓸개) 있는 단어라는 것은 단지 익히 알려진 이 감정의 색깔뿐만 아니라, 비애와 멜랑콜리가 한때(오늘날의 디프레션이라는 단어처럼) 아주 광범위하게 퍼진 깊고 절망적인 고통을 암시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

나의 출발점은, 어린아이가 뿌연 창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이었다. 이제, 비애와 멜랑콜리를 구분하는 데에 이르렀다. 한 사람이 느끼는 멜랑콜리가 아니라, 수백 명의 사람이 공통으로 느끼는 그 암담한 느낌, 비애에 가까워졌다. 나는 지금 이스탄불 전체의 비애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도시와 그 안의 사는 사람들을 서로 묶어 주는 그 유일무이한 감정을 이해하려고 하기 전에, 풍경화의 진짜 주제는 그 풍경만큼이나 그 풍경이 불러일으킨 감정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p.153.

나는 이 작가들을 함께 떠올릴 때마다, 어떤 도시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단지 그것의 지정학이나 건물 그리고 우연히 마주친 사람 자신들 특유의 모습이 아니라, 그곳에서, 나처럼, 오십 년 동안, 같은 거리에서 사는 사람들이 축적한 추억들과 문자, 색깔, 이미지가 자기들끼리 다투는 비밀스럽거나 공개된 우연들의 농도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럴 때면 이 네 명의 우울한 작가와 어린 시절에 만났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상상하곤 한다.


p.191.

아흐메트 라심 <도시편지>


p.214.

코추 <이스탄불 백과사전>


p.253.

하지만 이 사람들의 순진하고 좋은 면들과 그들이 믿는 것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것을, 이것이 현대화나 서구화, 경제개발 같은 거대한 계획을 어렵게 한다는 것을, 그들을 경시하는 집 안에서의 분위기가 때떄로 권위적인 분노로 변하는 것을 느끼고 알게 되었다. 단지 재산이 많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서구화된 실증주의자들이기 때문에 지배할 권리가 있는 이 '무식한' 사람들이 이상한 미신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에 단지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강하게 맞서야만 했던 것이다.


p.269.

오스만 제국 마지막 세대의 서구화된 부자들과 파샤들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전통문화뿐만 아니라 서구 문화와도 아주 친밀했던 이 사람들이 자신들의 아버지와 가족의 재산을 자본으로도 전환하지 않고, 자신들의 부를 이스탄불의 급성장하는 사업과 산업의 자본의 일부로 만들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무자비한 사기와 속임수를 쓰는 습관과 같은 수준의 '진정하고 진심 어린' 우정과 공동체 문화를 공유하는 '교양 없고, 세련되지 못한 상인들'과 함께 생산과 사업을 하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들은 그들과 같은 테이블에서 차조차 마시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p.313.

빅토르 위고 <동방시집>


p.358.

러스킨은 우연 때문에 히화적인 것은 '보존'될 수 없을 거라고 암시했다. 어차피 풍경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건축의 보존이 아니라, 보존되지 않고 폐허가 된 상태로 있는 것이다. 이스탄불 사람들이 모두 받아들이고 살아하고 널리 퍼트린 '아름다운 이스탄불' 이미지는 비애스러운 폐허의 분위기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보수하여 깨끗하게 페인트칠을 하고, 얼룩과 썩은 부분을 없애고, 처음 지어졌을 때처럼 혹은 18세기에 도시가 승리와 부유함을 구가하고 있을 때처럼 아주 새것으로 바꾸어 놓은 오래된 목조 가옥에 이스탄불 사람들이 왜 융화되지 못하는지를 증명해준다.


p.374.

시간이 흐를수록, 가족이라는 것은 사랑받는다는 것을 믿기 위해, 자신이 평온하고 편하고 안전한 곳에 있다고 느끼기 위해, 모두가 한동안 마음속에 있는 정령들과 사탄들을 숨기고 입 다물게 하며 행복한 척하는 집단으로 보였다.


p.407.

매번 구타를 당한 후 느꼈던 어두운 감정은 혼자 있는 나를 붙잡고는, 내가 사악하고 서툴고 죄를 지었으며 게으르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마음속의 어떤 소리는 "난 나빠, 그럼 어때!"라고 말하곤 했다. 순간적으로 내게 충격적인 자유를 선사하는 이 말은 내 앞에 아주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였다. 내가 끝까지 사악하면, 원하는 때에 그림을 그릴 수 있고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고 옷을 입은 채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싸움에서 지고 깨지고 의기소침해지고, 팔과 다리가 멍투성이가 되며, 입술이 터지고 코피가 나고, 여기저기 지독하게 구타를 당한 내 모습이, 대적할 힘도 없으면서 맞서다가 깨지고 모욕당하고 자존심이 무너진 나의 상태가, 이상하게도 마음에 들었다. 희열로 만들어 낸 꿈의 색깔, 상상, 바람처럼 내 마음을 휘감는, 어느 날 위대한 일을 할 거라는 생생한 욕망과 현실이 나를 매료시켰다. 이 모든 폭력, 자존심과 상상에는 사악함이나 도덕 같은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힘과 생동감이 있었다. 내게 깊은 행복과 새로운 삶을 약속하는 두 번째 세계는 폭력으로부터 자양분을 받았기 때문에 더 생동감 있고 매력적이었다.


p.417.

갈수록 증가하고 빈번해졌던 내 영혼에서의 혼란은 거짓말을 하거나 어른들처럼 위선적인 행동을 한 후가 아니라, 매 순간 내 삶 속에 있었다. 친구와 손짓 발짓으로 장난을 할 때, 베이올루에 있는 극장 앞에 표를 사려고 줄을 서 있을 때, 새로 알게 된 소녀와 악수를 할 때, 순간 어떤 눈(目)이 내 마음속에서 나와서 공중에 매달린 채 용의주도한 카메라처럼 그 순간 내가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을 (손을 내밀어 매표구에 있는 여자에게 영화표 값을 지불한다거나, 아름다운 소녀와 악수를 한 후 절망적으로 할 말을 찾고 있을 때) 내가 말하는 평범하고 위선적이며 바보 같은 말들을 ("<007 위기일발> 중간 자리 표 하나 주세요.", "이런 파티는 처음인가요?) 주의 깊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나 자신이 영화의 감독인 동시에 배우이자, 삶 속에서뿐 아니라, 내가 속한 삶의 조소적인 관찰자가 된 것 같은 순간이었다.


p.427.

그리고 아버지는 우리가 인생에 대해 물었던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은 절대 찾을 수 없을 테지만 그런 질문은 좋은 것이며, 삶의 목적과 행복은 우리가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 하고 싶지 않았던 곳에 있지만 이 모든 고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이 고민들로 고심하거나 삶에서 기쁨이나 심오함을 추구할 때 자동차나 집이나 배의 창문을 통해 보았던 모습들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삶은 음악이나 그림이나 이야기처럼 변화무쌍하게 끝이 날 테지만, 우리 눈앞에서 흐르는 도시의 모습은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꿈속에 나오는 추억처럼 우리와 함께 남을 거라는 것을 느끼게 해 주기 때문이다.


p.429.

때로 도시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변한다. 집처럼 편하게 느껴지던 거리의 색깔이 갑자기 변하기도 하고, 볼 때마다 신비스러운 군중들이 실은 수백 년 동안 인도를 오갔다는 사실을 알아 버리기도 한다.


p.433.

나는 가만히 누운 채 나를 그토록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도시의 복잡함과 낡음과 더러움이라고 생각했다. 패배로 인해 모든 것이 도중에 멈춰 버리자 이스탄불이라는 도시는 불완전한 곳이 되어 버렸다. 벽보, 대부분 영어와 프랑스어에서 차용한 가게 이름, 잡지 이름, 회사 이름이 나타내고 있던 서구화를, 그러나 도시는 그렇게 빨리 경험하지 않았던 것이다. 도시는 사원, 첨탑, 에잔, 역사가 암시하는 전통 또한 경험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하다 만 상태이며, 불충분하고, 불완전하다.


    면도칼가십시오점심시간필립스대리점의사창고카펫들문의유리제품변호사파히르


p.435.

모든 사람들이 건전하거나 까칠하게, 명랑하거나 따뜻하게, 편하거나 자연스럽게 맺는 관계와 우정을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연기를 펼치듯이 한다는 기분에 휩싸였던 걸까? 남들은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별로 문제없이-어쩌면 전혀 문제없이-하는 일을 나는 왜 이를 악물고 해야 하고, 나중에는 '그런 척했던' 나를 혐오해야 했던 걸까? 때로는 그런 연기에 '열광적으로' 몰입한 나머지, 연기를 한다는 걱정은 완전히 없어지고, 나의 연기와 조롱이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보다 재미있다는 희열을 다른 사람들처럼 만끽하기도 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내가 위선적이며 부정직하다고 느끼는 고통에서 드디어 벗어났다고 생각할 때, 갑자기 우울한 바람이 불어와서 이 모든 흥분의 와중에 나를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면 나는 다시 집으로, 나의 방으로, 나의 어둠 속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 사람들과 함께 있기 위해, 공동체와 단절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나 자신을 가장 먼저 혐오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는 언제나, 나 자신에게로 향했던 경멸 어린 시선은 주위로, 이제는 가족이라고 말하기도 힘들었던 어머니와 아버지와 형과 친척들에게로, 학교 친구들에게로, 다른 지인들에게로, 그리고 도시 전체로 향했다.


p.439.

나는 열여섯 살과 열여덟 살 사이에, 한편으로는 급진적인 서구주의자처럼 도시와 나 자신이 전적으로 서양인이 되는 것을 원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본능과 습관과 추억으로 좋아했던 이스탄불에 속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렸을 때는 이 두 가지 바람을(아이는 앞으로 건달도 되고 위대한 학자도 되겠다고 동시에 상상할 수 있다.) 머릿속 서로 다른 곳에 둘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갈수록 이 재능을 잃어버렸고, 나는 서서히 침울한 사람으로 변해 갔다. 이스탄불이 충분히 현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가난과 비참함에서 벗어나고, 그 위에 드리워진 패배감을 내던지는 데는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릴 거라는 것을 절망적으로 깨달았으며, 나의 삶과 나의 도시에 대해 슬퍼했다고도 할 수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스탄불 전체가 체념과 동시에 자랑스럽게 받아들인 비애는, 나의 영혼에도 바로 이렇게 스며들었다. 하지만 이것이 똑같은 비애였을까, 아니면 도시의 비애에 항복하는 것으로 인한 비애였을까?


p.509.

파묵은 세계적으로 '터키 작가'라기보다는 '이스탄불 작가'로 더 알려져 있다. 제임스 조이스 하면 더블린을 떠올리고 카프카 하면 프라하를 연상하듯, 이제 오르한 파묵은 자연스레 이스탄불과 동일시된다. 이스탄불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는 것, 그리고 현재까지 발표한 일곱 편의 장편소설 중 <눈>을 제외한 모든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이스탄불이라는 사실을 통해 그에게 왜 이런 수식어가 붙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p.513.

"폐허와 비애, 그리고 한때 소유했던 것을 잃었기 때문에 내가 이스탄불을 사랑한다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다른 물건들을 얻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폐허들을 보기 위해 나는 그곳에서 멀어져 다른 곳을 향해 걸어갔다." 라고 밝히고 있다. 파묵을 파묵이게 한 것은 다름 아닌 이스탄불의 비애였던 것이다.


p.514.

우리 모두는 고향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자라면서 그 소중한 고향을 계속 가질 수는 없게 된다. 우리가 고향을 사랑하는 것은, 고향이 오직 자신에게만 모든 것을 내어 주는 지극한 헌신의 결정체이며, 그 때문에 완전히 폐허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인 순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오르한 파묵에게 이스탄불은 고향의 고향이며, 폐허의 폐허다. 그러하기 때문에 오르한 파묵에게 이스탄불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심연이며 핵심이다. 이스탄불이 폐허가 된 원인은-오르한 파묵의 말에 의하면-'새로운 것에 대한 우리의 호기심'이다.


오르한 파묵에게 있어 이스탄불이라는 절망-동시에 사랑-은 '비애'로 말미암아 성장했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하게 자신의 슬픔을 키워 냈다면, 그것은 드디어 슬픔이 아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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