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판도라 상자
진은영
너의 말이 낡은 소파에서 일어나 세상에서 가장 큰 기지개를 켜는 날이 있었지
나의 말이 스텐 프라이팬에서 겹겹이 흩어진 양파처럼
희망의 냄새를 피우며 둥글게 구워지던 날이 있었지
우리의 말이 긴 속눈썹을 열고 부드러운 푸른 오솔길을 보여주던 날이 있었지
빨간 스프링의 모가지를 가진 슬픔이 담장 너머로 튀어 오르던 날이,
거대한 고깃덩이에서 기름을 떼어다가 미끄러진 도살장의 칼날 같은 말이,
너와 내가 아주 모호한 거리에서 만나고 헤어지며 주고받은 말이 있었지
나는 그냥,
망가진 몸의 상자로부터 뛰쳐나오는
상자에 그려진 무섭고 익살스런 녹색 표정의 마지막 유령이나 되었으면
아무 때나, 아무 곳에도 숨길 수 없는
- 2012, <훔쳐가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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