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딩거의 고양이.
이상하게도 나는 늘 영화를 볼 때면 영화에 나의 삶을 대입시켜 보곤 한다.
너무 당연한 거긴 해도 어찌되었든 내 삶으로 들어온 이상 내 인생의 한 부분이 되는 거니까.
모든 작품은 나 중심으로 도는 거고 모든 삶의 조각들이 내 세상에서는 전부 나 중심으로 이해되는 거니까.
어떻게 보면 나는 족구왕이 교훈주기로 겨냥한 '한창 청춘'에 맞는 나이이지만
족구왕 보다는 시리어스 맨 쪽에 더 많은 위로와 교훈을 얻었다.
"너는 세상을 아직 좆도 모르는거야. 내가 젊다면 너같이 살지 않겠어"
하는 족구왕의 꼰대식 설교보다는
"세상 일은 원래 좆도 모르는거야"
는 불확실한 정의가 내겐 더 위로가 된다.
요새 숙소에서 개미들을 때려죽이며
또 가끔 욕실에 나타나는 벌레들에게 뜨거운 물을 끼얹어 죽이면서
개미들 입장에선 그 죽음들이 얼마나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개미들 나름대로는 일을 하고 있는 건데
인간의 세상에 비추어 보자면 회사에서 보스를 위해 졸라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죽는 거잖아.
더군다나 죽이는 나는 별 생각이 없다.
그냥 귀찮고 싫어서.
인간 세계 위에 또다른 상위의 세계가 있다면,
내가 어떤 일을 당하든 어떤 일이 일어나든 그건 개미들이 죽는 것 만큼이나 불확실한 일이 아닐까.
잘 살다가도 어느날 갑자기 거대한 고민거리가 떨어질 수도 있는 건데, 그건 사람을 가리지 않으니까.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수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삶이란 원래 미스테리로 가득한 것이어서
열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란 말이 와닿는다.
인생엔 답이 있을 수 없고,
답이 있다 해도 모두 각자가 생각하기 마련인거고
그냥 어떤 일이 일어나든 Then What, 하고
지랄할 건 지랄하고 울건 울고 웃을 건 웃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힘들면 돌아갈 수도 있는 거고
포기할 수도 있는 거고
굳이 착하게 삶의 기준에 맞춰 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당장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하고 싶은 일이 바뀌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는 거고.
힘들면 힘든대로 징징거리며 울 수도 있는 거고.
내가 부러워하는 누군가는 그만의 다른 삶의 힘든 점을 가지고 있을 거고
극 중의 주인공처럼 자신이 늘 부러워하던그 사람이 나를 부러워할 수도 있는 거고.
무튼, 그래서 마지막 장면이 좋았던 것이,
내가 늘 걱정해 마지 않던 그것이 사실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단 거.
내 세상에선 아무것도 아닌 일이 다른 사람의 세상에선 엄청난 고민이 될 수도 있다는 거.
그렇게 삶은 불확실하고, 답을 내려고 고민해봤자 내가 신이 아닌 이상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것.
적어도 그것만큼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적용된 기본 설정일 테니까.
쫌 맘대로 살자. 아님 말고.
ps. 하워드 안녕
"Doing nothing is not bad.."
"Then w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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