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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디스 창고/문학

[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


카탈로니아 찬가

저자
조지 오웰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01-05-1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스페인 내전에 평범한 민병대원으로 참전한 오웰이 프랑코의 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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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4

전선을 보고 나자 나는 심한 메스꺼움을 느꼈다. 이것이 전쟁이란 말인가! 적과는 만날 수도 없는데! 나는 참호 밑으로 머리를 박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잠시 후 총알 하나가 불쾌한 소리를 내며 내 귀를 스치더니 뒤편 흉벽에 가 박혔다. 슬프게도 나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나는 그때까지 총알이 내 머리 위를 스쳐갈 때 절대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그 동작은 본능적인 것 같다. 그리고 거의 모두가 적어도 한번은 그렇게 고개를 숙인다.


p.64

몇 달 전 시에타모를 점령했을 때, 정부군을 지휘하던 장군은 즐겁게 말했다. "내일은 우에스카에서 커피를 마실 것이다" 그의 말은 거짓이 되었다. 여러 번 공격을 하여 많은 피를 흘렸지만 우에스카느 결국 함락되지 않았다. "내일은 우에스카에서 커피를 마실 것이다" 하는 말은 의례적인 농담이 되어, 전군의 입에 오랫동안 오르내렸다. 혹시나 내가 스페인에 다시 가게 된다면, 반드시 우에스카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야 말겠다.


p.140

이론적으로는 완전한 평등이었다. 실제적인 면에서도 완전한 평등에 가까웠다. 사회주의를 미리 맛보았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곳을 지배하는 정신적 분위기가 사회주의적이었다는 뜻이다. 문명화된 생활의 여러 가지 일반적인 동기들, 예컨데 속물 근성이라든가, 돈을 악착같이 벌어 모으려는 태도, 상관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아예 자취를 감췄다... 지금은 사회주의가 평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유행임을 나도 잘 안다. 세계 모든 나라에서 상당한 수의 어용 문사와 말주변 좋은 교수들이 사회주의란 약탈적 동기를 그대로 놓아둔 계획적인 국가 자본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느라 바쁘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와는 아주 다른 사회주의에 대한 비전도 존재한다. 보통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사회주의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이유, 즉 사회주의의 <비결>은 평등 사상에 있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사회주의란 계급 없는 사회일 뿐이다. 그것말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용군에서 보낸 몇 달이 나에게 귀중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스페인 의용군은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일종의 계급 없는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아무도 자기 이익에 급급해하지 않는 공동체,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특권이나 아첨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사회주의의 서막을 막연하게나마 감지했던 것 같다.


p.146

군중의 변화는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의용군 제복과 푸른 작업복들은 거의 사라졌다. 모두들 스페인 재단사들이 만든 멋진 여름 양복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디를 가나 뚱뚱한 여자, 우아한 여자, 늘씬한 차들이 눈에 띄었다. (아직 자가용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한다한 사람들은 차를 마음대로 부렸다.) 내가 바르셀로나를 떠날 때는 거의 없던 새로운 인민군 장교들이 놀랄 만큼 많이 돌아다녔다. 인민군은 장교가 열에 하나골이었다. 이 장교들 가운데 일부는 의용군에서 복무하다가 기술교육을 위해 후방으로 불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의용군에 입대하는 대신 전쟁 학교를 택했던 젊은이들도 다수 있었다. 이들 장교와 부하의 관계가 부르주아 군대와 똑같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분명한 사회적 차이가 있었다. 이것은 보수와 제복의 차이로 표현되었다... 아마 스무 명 가운데 한 명 이상이 전선에 가본 적도 없을 터였다. 그러나 모두들 허리에는 자동권총을 차고 있었다. 우리가 전선에 있을 때는 애걸로도, 돈으로도 구할 수 없던 것이다.


p.294

외적인 사건들은 약간씩 기록을 했지만, 그 사건들이 나에게 남긴 느낌은 기록할 수 없다. 그것들은 모두 글로는 전달할 수 없는 광경이나 냄새, 소리와 뒤섞여 있다. 참호의 냄새, 가없이 뻗어나가는 서광, 땅땅거리는 싸늘한 총소리, 폭탄의 굉음과 섬광. 지난 12월, 사람들이 아직 혁명을 믿고 있던 시절의 바르셀로나를 찾은 아침의 맑고 차가운 빛, 병영 연병장에서 쿵쿵거리는 군홧발 소리. 음식을 사기 위한 줄과 검붉은 깃발과 스페인 의용군 병사들의 얼굴. 무엇보다도 스페인 병사들의 얼굴. 전선에서 만났지만 이제는 어디로 흩어졌는지 모르는 사람들. 일부는 전사하고, 일부는 불구가 되고, 일부는 투옥되었겠지.


이천 참사-어떻게 끝이 나건 스페인 전쟁은 살육과 신체적 고통은 별도로 하고라도 경악할 만한 참사였다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를 잠깐 보았다고 해서 꼭 환멸과 냉소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 경험 전체를 통해 인간의 품위에 대한 나의 믿음은 약해지기는 커녕 오히려 강해졌다. 내가 한 이야기가 사람들을 오도하지 않기 바란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누구도 완벽하게 진실하지도 않고 또 진실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본 것 외에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확신하기 힘들며, 모두가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당파적인 입장에서 글을 쓰게 된다. 혹시 앞에서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니 지금 말해 두겠다. 나의 당파적 태도, 사실에 대한 오류, 사건들의 한 귀퉁이만 보았기 때문에 생길 수밖에 없는 왜곡을 조심하라. 또한 스페인 전쟁의 이 시기를 다룬 다른 책을 읽을 때도 똑같이 조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