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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디스 창고/문학

[천명관] 고래

 


고래

저자
천명관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4-04-1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제1회 『새의 선물』의 은희경, 제2회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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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의 분홍빛 엉덩이에 꽃물이 고인듯 잘 익은 복숭아를 와삭, 하고 한 입 베어물며 어제 파울로 코엘료가 페이스북에 남겼던 글귀 하나를 떠올린다.


Experience is agony and ecstasy at the same time. Pain and joy holding hands.


좋은 세상이다. 저편 어딘가에서 쓴 글을 내가 24년간 줄기차게 써온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것도 놀라운데, 이제는 그가 올리는 글을 몇 초도 되지 않는 순간에 받아볼 수 있다. 유명인인 그의 얼굴과 글을 내가 안다는 것만 제외하면 그와 나 사이에는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지만, 적어도 그 순간 만큼은 서로 각자의 비슷한 경험을 떠올릴 수 있다. 둘 뿐만이 아니다. 그 짧은 문장에 미소를 짓거나-감명을 받거나-적어도 고개 한번 끄덕여 Like 버튼을 누른 사람의 숫자가 6999명이나 된다는 사실은 참 재밌다.


그 글을 보는 순간 내가 떠올렸던 나의 경험들이 있다. 쿨럭, 하고 작은 헛기침이 나왔다. 고뇌이자 환희였던 수많은 삶의 순간들을 되짚고 그 때의 기억을 곱씹어 보았다. 그렇게 그 글을 마주한 시간의 반원 안에 적어도 6999개의 경험이 머릿속에 펑, 하고 떠올랐다 사라졌을 것이다.


천명관의 <고래>가 내 삶에 어떻게 들어왔냐 하면, 여행을 통해서였다. 런던에서 만난 꽃을 좋아하는, 책 읽기를 좋아하고 마음이 여렸던,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고 펑펑 울었다던, 한 언니와의 아무럴 것 없는 작은 대화에서였다. 책이 좋다며, 꼭 읽어보라는 말에 "국문과인데도 책을 잘 안 읽어요"라고 미리 핑계어린 선수를 치며 머리를 긁적였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한참을 잊고 지냈다. 당장 읽어야 하는 책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고, 그마저도 읽기는 커녕 매일 고작 20페이지씩, 30페이지씩 책갈피를 옮길 뿐이었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날 그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박민규의 소설을 다시 읽어보려고 빌려오는 길에 내가 생각났다고 했다. 그제서야 천명관의 소설이 생각난 나는 "아, 나도 언니가 추천해준 책을 곧 읽어봐야 겠다"며 또다시 머리를 긁적였고, 언니는 마침 인터넷으로 책 주문을 하고 있다며 내게 <고래>를 선물해 주었다.


항상 겪어도 항상 놀라운 총알같은 책배송에 또 한번 놀란 뒤 마주한 <고래>는 강렬한 주황빛이었다. 수상작 소설이어서인지 어째 촌스러워도 너무 촌스러웠다. 하지만 책 겉장을 넘기자 마자, 정말 나도 모르게, 앉은 자리에서 한 권을 다 읽어 버렸다. 올해 들어 4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한 권의 책을 다 끝낸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모킹제이>조차 몇 번에 나누어 봤는데! (물론 그 날 달리 할 일이 없었기도 했다)


그만큼 흡입력 있는 소설이었다. 뒷 이야기가 궁금해 허둥지둥대며 급하게 읽어버린 책은 정말 오랜만이다. 처음부터 등장하는 '고래'의 푸르고 거대한, 살아있는 생명의 이미지가 읽는 내내 속에 떠다녔다. 매일 신문에서 딱딱하게 정의내리고 숫자로 치환되는 생을 접하다가 살아 숨쉬는 생명들의 꿈틀대는 진짜 이야기(정작 이야기들은 '진짜' 일 수 없는 환상성을 지니고 있지만)들을 읽고 있자니 내 안에서도 뭔가  생명이란 게 꿈틀하는 느낌을 받았다. 생명의 역사와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말이 안 되게, 또는 가장 말이 잘 되게 풀어낸 이야기는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대로 내려오는 흐름의 주체가 보통과는 달리 '여성'이기도 했고, 그 속에서 여성의 생명력이라든가 하는 것이 긍정적으로 그려지기는 했지만 이 나쁜 나는 오히려 그래서 그 부분이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아무래도 작가가 남자여서, 여성을 또 여성 그대로만 보질 않고 또 이런 잣대와 틀을 대려는 건가, 하며 툴툴대기도 했다. 아무래도 금복이 남자로 변했을 때가 가장 그 '이분법' 적인 사고관을 보여주는 유치한 구조가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하지만 만약 이 소설의 작가가 여성이었다면 또 다르게 느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 좀 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겠지.


세상은 신비롭다. 세상은 추악하고 더럽고 악하고 한없이 슬프지만, 또 아름다운 사람들과, 고뇌하며 푸르른 것들과, 때묻은- 혹은 때묻지 않은 아이들을 보면 세상은 기쁘고, 파르르 떨리고, 설레고, 순수하다. 그 간극 사이에서 항상 불안하다. 어느 생각으로 내 마음을 옮기든지 다른 한 편에 늘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고래>를 알고, <고래>를 읽고, <고래>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나 장황하게 쓰게 된 과정은 세상의 신비로움에 가깝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그에게서 책을 선물 받고, 그 책이 나의 마음과 나의 머리와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 사람- 때문에 울고, 사람- 때문에 웃는다는 흔한 문구는 흙과 엄마의 몸에서 태어난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해당할 것이다. 나는 그간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었나? 누군가에게 행복이었나?



p. 406

그렇다면 왜 그녀는 벽돌을 굽는 일에 그토록 필사적으로 매달렸을가? 그녀는 그 단조로운 작업을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무슨 생각을 한 걸까? 그 작업 안에 어떤 종교적 희원이 담겨 있었다면 그 바람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감동적이리만치 순정하고 치열했던 그 열정의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진실이란 본시 손안에 쥐는 순간 녹아 없어지는 얼음처럼 사라지기 쉬운 법이다. 그래서 어쩌면 혹, 그 모든 설명과 해석을 유예하는 것만이 진실에 가까워지는 길이 아닐가? 그럼으로써 그녀를 단순하고 정태적인 진술 안에 가둬두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만이, 또 그럼으로써 그 옛날 남발안의 계곡을 스쳐가던 바람처럼 가볍게 흩어지도록 놓아주는 것만이 진실에 다가가는 길은 아닐가? 독자 여러분, 이야기는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