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타디스 창고/문학

[한강] 바람이 분다, 가라

 


바람이 분다 가라

저자
한강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10-02-2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그날 새벽 폭설이 그 모든 흔적을 덮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 ...
가격비교

 

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렇게나 어렵고 고되다. 달의 뒷면을 보려는 우리의 노력은 언제나 산산이 부서지고야 만다. 태초의 기원을 더듬더듬 찾아 헤매는 과정이 그렇듯, 다른 몸이 이고 있는 우주를 이해하는 것도 언제나 그렇게 캄캄하고 막막하다. 알려고 하면 할수록 아득해진다. 하지만 달의 뒷면을 알아야 비로소 달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평생을 누군가와 함께 살아왔지만, 결국 평생을 혼자 살아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 더듬 더듬, 장님처럼 형체를 손끝으로 그려 그 실루엣과 살아갈 뿐이다.

 

나의 우주를 오로지 나 혼자 지고 가야된다는 사실은 퍽 적적하다. 그래서 그렇게 절반 뿐인 관계를 끝없이 스스로에게 밀어넣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눈을 꾹 감고, 나도 나의 반쪽만을 내보이며, 서로에게 영원히 풀리지 않을 반쪽짜리 수식을 내어놓는다. 반쪽짜리 두 개가 만나 해결이 날 리 없다.  저마다의 씨앗에서 움터 저마다의 선을 지니고 있는 우리는 나약하고 작고 아프다. 통증은 모든 곳에 있다. 

 

하지만 이 끝없는 삶의 불협화음에도 불구하고 꼭 가야만 하는 이유는 있다.

 

아마 그렇게 짓이겨진 데서 다시 더운 것이 흐르기 때문이다. 맑고 투명한 물 속에서 파란 조약돌을 건져올리기 위해서다. 짓이겨진 무거운 무릎을 끌고 뜨거운 배로 바닥을 밀고 가기 위해서다. '얻어맞은 개처럼 젖어있을 눈'을 하고 끝없이 그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더듬대기 위해서다. 

 

책을 덮고나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바지락 칼국수 한 그릇이 먹고 싶어졌다.

 

 

 

 

 

p.52

... 나를 사랑한다는 그 어떤 남자의 말은,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말일 수도 있고,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고, 내가 그를 위해 많은 걸 버려주길 바란다는 말일 수도 있지. 단순히 나를 소유하고 싶거나, 심지어 나를 자기 몸에 맞게 구부려서, 그 변형된 형태를 갖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자신의 무서운 공허나 외로움을 틀어막아달라는 말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내가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야.

 

p.139

이십여 년 전, 삼촌의 서가에서 빌려온 책들을 읽으며 생각했다.

 

일반상대성의 원리대로, 물질의 질량에 비례해 주변의 공간이 휘어진다면-그게 행성처럼 거대한 것들에만 적용되는 원리가 아니라면-타인의 몸 주위로 구부러진 공간의 만곡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며, 자신의 구부러진 공간 속으로 타인을 불러들였다 내보내곤 하며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리라고.

 

한 사람이 가진 고유한 파동이 그 휘어진 공간의 경계까지 퍼져나가는 거라면-그 경계의 윤곽을 아우라라고 부르는 거라면-삼촌의 그걸 아마 나는 느껴보았다고. 눈도 귀도, 코도 살갗도 아닌,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감각으로.

 

p.250

밤도 이상한데...... 새벽은 더 이상해. 삼 년쯤 잠을 안 자면 사람이 이상해지는 걸까? 그러니까, 내가 이상해져서 새벽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걸까? 밤에는 결이 있고 마디가 있고 틈이 있는데...... 새벽은 안 그래. 어떤 물결이야. 어떤 핏줄, 어떤 생명 같은 거...... 두근거림 같은 거. 빠담! 빠담! 빠담! 이 노래 가사가 무슨 뜻인지 알아? 심장 뛰는 소리야. 두근두근 뛰는 소리가 아니라, 쿠쿵! 쿠쿵! 쿠쿵! 새벽은 그래. 심장처럼 뛰어.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죽일 수 없는 게 내 안에 있어. 그게 느껴져. ......내가 미친 것 같니? 이상한 것 같아?

 

p.255

얻어맞은 개처럼 젖어있을 눈

 

p.264

그 밤으로부터 열흘이 지나갔습니다. 그동안 누구를 만나고, 어떤 이메일을 주고받고, 달아오른 휴대폰에 매달려 약속을 구걸했습니까? 몇 개의 퍼즐 조각을 더 찾아냈습니까? 그것이 당신의 친구의 인생에 꼭 들어맞습니까?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책을 쓰기 시작했습니까? 숭숭 구멍 뚫린 그림을 완성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까?

 

나는 믿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찾아지지 않고, 어떤 것도 완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의 하나 완성된다 한들 누구도 당신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언어를, 눈물을, 피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p.317

이것으로 내가 아픈 데를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건물 유리창들이 힘차게 되쏘는 오전의 햇빛을 올려다본다. 흑백사진 속 영산홍 앞에 서 있던 젊은 여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눈앞에 새겨진다.

 

닥쳐. 도취하지 마. 앞지르지 마. 그녀들은 당신이 원한 것만큼 약하지 않았다.

 

p.320

달은 기계적으로 반듯하게 지구를 중심으로 공전하지 않는다. 수없이 흔들리며 뒷면을 조금씩 드러낸다. 그 때문에 지구에서 관측할 수 있는 달의 표면은 50퍼센트가 아니라 59퍼센트다. 흔들리며 드러난 약간의 뒷모습을 따라 9퍼센트의 불완전한 지도를 그려갈 수 있다.

 

p.335

나는 너를 몰랐다,

네가 나를 몰랐던 것보다 더.

 

p.340

짐작할 수 있겠니.

 

나약함이 죄의 시작일 수 있다는 걸. 간절함이 알 속의 죄를 깨어나게도 한다는 걸. 문밖이 낭떠러지인 줄 알면서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어리석음을. 모든 일들의 시작이 자신이었음을, 그러니 자신을 제거하는 것만이 단 하나의 논리적인 길임을 확신하는 순간을. 무의미로 무의미를, 어리석음으로 어리석음을 밀봉하려는 마지막 결단을.

 

p.367

억울하지 않았어. 내가 바를 넘지 못해서였어. 바를 넘었다면, 아무리 바람이 불었다 해도 장대는 나를 찌를 수 없었어.

 

수없이 돌이켜보았기 때문에 다른 결론은 없다는 듯, 인주의 침착한 말씨에는 완고한 데가 있었다.

 

기억해. 바람이 부니까 뛰지 말까, 그때 생각했었어.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 넘어가고 싶었어. 정말 넘어가고 싶었어.

 

 

'타디스 창고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현욱] 동정 없는 세상  (0) 2014.08.13
[한강] 채식주의자  (0) 2014.08.12
[박완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0) 2014.08.05
[박완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0) 2014.08.02
[천명관] 고래  (0) 2014.08.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