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무덤 - 祭亡妹歌(제망매가) - 기형도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철철 술을 부어주랴
시리도록 허연
이 零下(영하)의 가을에
망초꽃 이불 곱게 덮고
웬 잠이 그리도 길더냐.
풀씨마저 피해 날으는
푸석이는 이 자리에
빛 바랜 단발머리로 누워 있느냐.
헝클어진 가슴 몇 조각을 꺼내어
껄끄러운 네 뼈다귀와 악수를 하면
딱딱 부딪는 이빨 새로
어머님이 물려주신 푸른 피가 배어나온다.
물구덩이 요란한 빗줄기 속
구정물 개울을 뛰어 건널 때
왜라서 그리도 숟가락 움켜쥐고
눈물보다 찝찔한 설움을 빨았더냐.
아침은 항상 우리 뒷켠에서 솟아났고
맨발로도 아프지 않던 산길에는
버려진 개암, 도토리, 반쯤 씹힌 칡.
질척이는 뜨물 속의 밥덩이처럼
부딪히며 河口(하구)로 떠내려갔음에랴.
우리는
神經(신경)을 앓는 中風病者(중풍병자)로 태어나
全身(전신)에 땀방울을 비늘로 달고
쉰 목소리로 어둠과 싸웠음에랴.
편안히 누운
내 누이야.
네 파리한 얼굴에 술을 부으면
눈물처럼 튀어오르는 술방울이
이 못난 영혼을 휘감고
온몸을 뒤흔드는 것이 어인 까닭이냐
향가 발표를 하려고 <제망매가>를 현대적으로 차용한 작품을 찾다가 기형도의 시를 발견했다.
기형도 시인은 낯설지 않지만 이 시는 처음이었는데, 굉장히 강렬하게 꽂혔다.
실제로 그가 셋째 누이를 잃고 쓴 시여서인지 모르겠지만
한구절 한구절, 시리지 않은 행이 없다.
마음이 아리고 내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린다.
'타디스 창고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루이제 린저] 삶의 한가운데 (2) | 2013.11.11 |
---|---|
- (0) | 2013.10.20 |
"인생을 두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0) | 2013.09.03 |
[최광희] 무비스토커 (0) | 2013.08.19 |
[존 롤즈] 정의론 (0) | 2013.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