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有
드디어 모킹제이까지 다 읽었다. 일반적이지 않은 순서였다. 우연히 센터 아이들과 함께 보러 간 영화 <캣칭 파이어>에 반해 그 길로 집에 돌아가 영화 <헝거게임>을 봤고, 그 2시간에 빠져버려서 <헝거게임>과 <캣칭파이어> 책을 샀다. <헝거게임> 책을 사던 날이 기억난다. 아마도 크리스마스 언저리였던 것 같다. 학교 도서관에 갔다가 예약인원이 9명이나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바로 교보로 달려갔더랬다. 당장에 내 손에 쥐고 싶은 생각에 적립금까지 탈탈 털어 책을 샀고, 집에 가는 길에 이마트에도 들려 양궁 세트를 샀던 기억도 난다.
(사진은 그 때 페북에 올렸던 인증샷)
내가 헝거게임에 그토록 빠졌던 이유는, 물론 화려한 볼거리와 줄거리 때문도 있었지만 그것보다 먼저 '우리'의 모습이 겹쳤기 때문이다. 많은 판타지가 현실과 동떨어진 다른 세계를 얘기한다면(물론 거기에도 나름의 은유는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헝거게임은 내가 현재 밟고 있는 땅의 이야기의 은유에 색을 입혀 잘 펼쳐놓은 그림 같았다. 그리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서 내가 우리 사회를 뒤돌아볼 여지를 준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영화와 책은 서로 다른 면에서 상호보완적이다. 영화는 책에서 강렬하게 그려지는 혁명의 상징인 '캣니스, 불타는 소녀'를 제니퍼 로렌스라는 뛰어난 소녀로 형상화해낸다. 아이들을 싸움판으로 몰아넣고 서로 살육하게 하는 캐피톨의 비정함은 눈과 귀로 보고 들었을 때 더욱 강렬하다. 하지만 영화는 아무래도 500페이지를 2시간으로 줄이다보니 앞뒤 관계의 설명이 부족하고 그 속에서 캣니스가 떠올리는 모든 생각의 흐름들은 짧은 표정연기로 대체될 뿐이다. 책은 영화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인물들의 내면 심리와 세계관을 좀 더 자세히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는 헝거게임 경기장은 전략적이다. 캣니스와 피타가 그곳에서 함께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보여질 그들을 잘 연기해냈던 것 때문이다. 지금의 우리와 다를 것이 없다. TV에 나오는 것들에 현혹되고, 그 이면에 있는 진짜 의미를 찾아내려 노력하지 않는다. 그저 보고, 웃고, 슬퍼하고, 그 감각에 우리 자신을 맡긴다. 하지만 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연기만은 아니었다.
피타와 캣니스는 거짓으로 연인 행세를 했지만 그들이 서로를 (어떤 의미로든지) 사랑하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었고 선물을 얻기 위해 의도된 입맞춤을 했을지언정 캣니스가 피타를 아끼는 마음만큼은 진짜였다(그래도 캣니스는 시청자들을 상대로 연기를 많이 하긴 했다). 게다가 캣니스가 죽은 루를 위해 했던 행동, 피타에게 줄 약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잔치에 달려간 것은 절대 연기로는 할 수 없는 진짜였다. 경쟁과 살육이 난무하는 헝거게임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인간애와 사랑에 사람들은 희망을 보았고, 감동했다. 결국, 항상 '진짜'만이 굳게 언 마음을 녹인다. 스노우 대통령은 이를 두려워해 구역 간의 교류를 막고 편애 구역을 만들어 서로를 미워하게 했지만 그 모든 걸 뛰어넘은 화신으로서의 모킹제이에 사람들은 힘을 모았다.
캣니스가 완벽한 영웅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물론 전반적으로 보면 그녀는 영웅이 맞기는 하지마는 그녀는 작은 일에 고민하고 자신과 프림을 배고픔에 내버려 두었던 엄마를 원망하는 평범한 딸이며 게일과 피타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소녀이기도 하다. 또 누구보다 잘 싸울 수 있지만 누군가를 해치기 두려워하는, 누구보다 강해보이지만 누구보다도 한껏 사랑을 내어줄 줄 아는 사람이다. 제니퍼 로렌스가 이 역을 맡았다는 것도 좋고, 처음 영화를 볼 때 '좀 약하지 않아?' 싶었던 남주인공인 피타도, 3권까지 마친 지금 정말 잘 어울린다! 부드럽고, 약하지만 강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보듬어줄 수 있는 그런 존재.
캣니스는 불타는 소녀이긴 하지만 남들이 하는 말에 휘둘려 한번에 자신이 나갈 길을 향해 달려나가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자기 편이 저지른 일이라도 그게 옳은 것인지 의심하고, 아니라고 생각했을 때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앞으로 나가 자신의 뜻을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일이라는 것은 그녀의 판단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녀는 솔직하고,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라면 두려움 없이 행하고, 잘못된 일이라 생각되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모킹제이의 결말이 정말 좋았다. 세상에 선과 악이라는 대립적인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쁜 사람과 덜 나쁜 사람으로 나뉠 뿐이다. 때문에 우리의 선택은 무작정 악의 반대편의 저쪽으로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중간 지점을 찾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끝없이 의심하고, 고민하고, 우리의 욕망과 싸워야 한다. 캣니스는 그걸 알고 있었다.
여성작가가 쓴 판타지 소설이라 그런가, 게일(힘, 폭력, 파괴, 극단적) vs 피타(약함-그렇다고 피타가 약한 것만은 아니지만-, 부드러움, 포근함)의 대비와 연관되는 삼각관계가 있어서 더 좋았다. 그 연애감정이 트와일라잇처럼 유치하지도 않고.. 특히 피타가 만드는 '빵'이 갖는 생명력, 특히 캣니스가 배고픔에 나락으로 떨어져갈 때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에게 빵을 던져줬던 그 옛날의 기억은 캣니스와 피타가 헝거게임에서, 또 앞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잘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에서 캣니스가 말했듯 캣니스에게 필요한 것은 '봄의 민들레'다. 파괴가 아니 부활을 의미하는 밝은 노란색. 피타가 만들었던 결혼식 케이크처럼 밝고 행복한.
어찌됐든 그래서 나의 스벅 닉네임은 캣니스고(내가, 라서가 아니라 이상형이라서) 우리집 한쪽 벽 아래에는 활과 화살이 담긴 통이 누워있고, 나는 11월에 개봉한다는 모킹제이 part 1을 기다리고 있다. 굳이 어렵게가 아니더라도 나의 삶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런 이야기들이 좋다. 오히려 이런 이야기는 나를 더 반성하게 만들고, 현실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를 눈앞에 보여주며, 그걸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효과적이다. 캣니스가 가장 부러웠던 점은 그녀의 솔직함과 그걸 내뱉을 수 있는 용기다. 그걸 위해서 나가서 체력이라도 키워야 하나, 잠깐 생각하기도 했지만 아마도 그건 그녀의 체력 때문이라기보다 깊은 상처 위에 쌓인 마음의 굳은살 때문일 거다. 재미있는 건 사람에게 받은 그 상처를 치유하는 약은 언제나 사람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나락으로 떨어지고 크게 긁혀도, 결국 우리는 사람에 의지하고 그 사랑으로 치유받을 수밖에 없다.
나는 도서관에 가면 남들이 보다 놓은 책들이 올려져있는 북트럭을 뒤적거리는 습관이 있는데, 며칠 전 도서관에 들렀다가 (당연히 예약이 꽉차 빌릴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모킹제이를 정말 우연히 북트럭에서 발견했다. 헝거게임 마지막 시리즈인 모킹제이는 그렇게 내 손으로 날아들었고, 나는 책을 펼쳤고, 마지막 마침표를 읽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요소들로 가득 찬 책들이었고, 소설책은 잘 사지 않는 나란 녀석의 책장 맨 윗칸에 그 세 권은 언제나 나란히 놓여있을 것이다. (모킹제이를 산 다음의 일이겠지만)
비록 자신이 인간이지만 나는 인간이라는 이름의 괴물들에게 더 이상 아무런 충성심을 느끼지 못한다. 피타가 예전에 우리가 서로서로를 죽이고 뭔가 근사한 종이 지구를 차지하는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서로간의 이견을 조율하기 위해 아이들의 목숨을 희생시키는 생물에겐 뭔가 큰 잘못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갖다 붙일 수 있다. 스노우는 헝거 게임이 효율적인 통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코인은 낙하산을 쓰면 전쟁이 더 빨리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이득을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 아무도 없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런 일이 일어나는 세상에서 이득을 볼 사람은 누구도 없다
지금은 아니야. 지금 우리는 최근에 일어난 끔찍한 일이 절대로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모두가 합의한, 아름다운 시대를 살고 있지. 하지만 집단적인 생각은 대체로 오래 가지 못해. 우리는 기억력은 나쁘고 자기 파괴 능력은 뒤어난, 변덕스럽고 어리석은 존재거든. 하지만 혹시 알아? 어쩌면 이게 끝일지도 모르지, 캣니스
해변에서 나를 사로잡았던 갈망을 다시 느끼는 어느 날 밤, 결국은 이렇게 되었을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거은 분노와 증오로 타오르는 게일의 불이 아니었다. 불이라면 내가 충분히 가지고 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봄의 민들레다. 파괴가 아닌 부활을 의미하는 밝은 노란색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잃었어도 삶은 계속될 수 있다는 약속이다. 다시 좋아질 수 있다는 약속이다.
자기들이 노는 곳이 무덤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내 아이들. 피타는 괜찮을 거라고 한다. 우리에겐 서로가 있다. 그리고 책이 있다. 아이들이 이해하게 할 수 있고, 아이들은 그로 인해 더 용감해질 거라고 한다. 하지만 언젠가는 내 악몽에 대해 설명해 주어야 할 것이다. 내가 왜 악몽을 꾸는지. 왜 악몽이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인지 말이다.
내가 어떻게 악몽을 견뎌내는지 말해 줄 것이다. 유난히 힘든 아침이면 곧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에 그 무엇에도 기쁨을 느낄 수 없다고 말해 줄 것이다. 그럴 때면 내가 보아 온, 누군가가 선한 일을 했던 기억을 죄다 떠올린다. 마치 게임처럼. 하고 또 한다. 20년 넘게 했더니 이젠 조금 지겨울 정도다.
하지만 이보다 더 나쁜 게임도 있으니까.
그리고 정말 촌스러운 우리나라 포스터.
캐피톨
블로그 찾아보니 헝거게임에서 성경의 상징을 찾은 분석도 있었다. 영어라서 제대로 다 이해는 못 했지만..
에피 트링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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