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아니 한 새벽2시까지 떠들었으니 어제 밤이라고 하는 게 더 맞겠다. 최근 풋풋한 연애를 시작한 여동생과 오랜만에 수다를 떨었다. 동생은 어제 남자친구와, 그 남자친구를 소개해준 친한 여자친구와, 그 여자친구와 같은 무리에 있는 다른 친구 한명과 다같이 만나 카페에 갔다고 말했다. 그리고 누군가의 연인이 자리에 끼면 통과의례처럼 묻는 '뿅뿅이 어디가 제일 좋아?' 질문이 어김없이 나왔고 아직 어색한 두 사람은 우물쭈물 했던 것 같다. 문제는 남자친구가 그 자리에서 "뿅뿅이의 긴머리가 좋다"고 말했다는 거다. 다른 건 없냐는 질문에는 "한번 사과머리를 하고 나온 적이 있는데 그게 잘 어울렸다"고 말했단다. 동생은 어떻게 그런 외적인 것만 나열할 수가 있냐며 서운함을 토로했고, 나는 그 기분이 이해가 돼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줬다.
어렸을 적 우리 자매가 주로 가지고 놀던 인형은 그 흔한 미미였다. 인형은 여러 개가 있었지만 동생과 나는 서로 금발의 긴머리 여자인형을 차지하려 종종 다툼을 벌였다. 가장 인기가 없었던 인형은 갈색 단발머리 인형이었다. 그무렵 만화영화에 나오는 여주인공도 대부분 머리가 길었다. 동생과 내가 <세일러문> 중 가장 싫어했던 캐릭터는 머큐리였다. 짧은 머리에, 똑부러지고, '여자색'이 아니라고 인식되던 파란머리를 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던 것 같다. 머큐리는 가장 이성적이고 똑똑했지만, 동생과 어느 누구도 머큐리를 맡으려고 싸우지 않았다. 우리가 주로 역할을 두고 다투었던 캐릭터는 메인 주인공인 세라거나 혹은 마스, 비너스였던 것 같다. 둘다 검거나 노란 긴 머리를 갖고 있다.
웨딩피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가장 서로에게 떠밀던 캐릭터는 데이지였다. 친척언니와 셋이 모여 노는 자리에서 누군가는 짜증을 참고 양보하며 데이지를 맡아야 했다. 지금와서 데이지가 이상한 애인가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다. 다만 데이지는 다른 두 캐릭터에 비해 좀 더 괄괄하고(피치도 괄괄하긴 하지만 그저 귀여운 말괄량이에 불과한 반면 데이지는 태권도를 했던 것 같다) 가장 중요한 것은, 머리카락이 짧았다. 아마 그 당시 나의 머릿속 구조를 그려보면 대략 <긴 머리 = 예쁜 주인공 = 여성스러움 = 왕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여자> 였을 것이다.
긴 머리의, 말괄량이지만 어딘지 연약한 구석이 있고, 선한 얼굴. 그리고 그녀를 사랑해주는 턱시도가면님. 대부분의 여자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그런 자신의 모습을 선망하며 자라난다. 지금은 그런 말도 안 되는 게 어디있냐고 할 나도 어렸을 적엔 그런 말도 안 되는 로맨스에 나를 대입시켜 설렜었던 기억이 나니 뭐 말 다했다. 환상속의 나는 항상 예쁘다. TV만화 속 주인공은 항상 예뻐왔고, 그 세계 속에서 주인공은 항상 사랑받았기 때문이다.
만화를 떼고, 현실을 살아오면서 나는 그 중에 일부분은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다. 긴 머리의,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예쁘다고 인정할만한 여성성을 지닌 선한 표정의 여자아이는 늘 사랑받았다. 그런 아이들은 항상 주류의 세상에 낄 수 있었고 모두의 관심을 얻기 쉬웠다. 중학교 무렵 친했던 정말 예뻤던 친구가 기억이 난다. 그 아이는 늘 남자아이들 속에 둘러싸여 있었고 심지어 여자아이들까지 그 아이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윗학년 선배까지도 그 아이의 핸드폰 번호를 알기 위해 이리저리 수소문했다. 다른 애들보다 특별히 뭔가를 잘하는 것도 없었는데도 그 아이의 얼굴에선 빛이 났다. 박민규가 소설 속에서 말하는 반짝거리는 필라멘트의, 전구의 빛이 터질듯 반짝댔다.
단지 만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만화에서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현실의 모든 여자아이들이 그렇게 빛이 나거나 사랑받을 수 없다는 거였다. 못생기거나, 여자답지 않다거나, 뭔가 결점이 있다 하면 그 아이는 만화같은 사랑의 세계에서 제외된다. 나는 그 세계에 속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들이 딱히 부럽지는 않았다. 속이 빈 깡통같은 연애를 하고, 다음날 학교에 와서 뭘 했다느니, 누구는 진도를 어디까지 나갔다느니 하는 것들이 삶이 아니라 '생활'처럼 느껴졌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저 남들이 다 하는데 나도 이런 것쯤은 해봐야지! 하는 구호가 만들어 낸 하나의 상품 같은 연애가 많았던 것 같다.
박민규의 소설 한 구절구절은 모두 내 머릿속에 있었다. '그녀'가 겪은 일 하나하나, 했던 말 마디마디는 모두 내 머릿 속에 있었다. 내가 느껴보지 못한 일들도 있었지만 이해하지 못할만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현실에선 늘 세일과 세일이 이어졌고,모두가 잘 살아보자고 노래하지만 그 목표는 삶이 아니라 '생활'이었다. 어딘가 뇌 속 귀퉁이에 앉아만있던 그 작은 감정의 파편과 덧없이 부유하던 생각의 조각들은 박민규의 조용한 이야기를 따라 차분히 정리되었다. 사랑하는 법을 잃어버리고 부끄러워하거나 부러워하는 법만을 기억하는 사람들. 예쁜 얼굴과 쌓인 돈더미에 와와 하고 단지 상상력이 만들어냈을 뿐인 누군가의 스펙에 예예 하는 사람들. 그 수많은 생활들, 분명 내 안에도 어딘가 쌓여있을 수많은 생활들을 경멸하며 소설 읽기를 끝냈다. 사랑에 실패한 인간들.
작가는 이 소설이 못생긴 여자를 위한 선물이라 썼지만, 오히려 진짜 못생긴 건 자신이라는 걸 잊고 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내는 미술잡지의 엽서같은 것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에게 띄우는 라디오 사연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것>을 규정해버리는 세상의 많은 것들이 싫다. 다수가 규정해버린 그 <좋은 것>을 성전처럼 받들고 그 앞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은 언젠가 자신이 그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우리가 달려드는 딱 그만큼 , 성전은 더 높아질 것이다. 정말 나부터가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앞으로 달려나가는 법보다 옆을 돌아보고 사랑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만, 나의 생활은 비.로.소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요? 난 딸기밭에 가는 중이에요. 실감 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머뭇거릴 일도 없죠. 딸기밭이여, 영원하리.
그리고 늦은
여름이었을 것이다. 샤워를 하다 문득, 이별이 인간을 힘들게 하는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사라졌다는 고통보다도, 잠시나마 느껴본 삶의 느낌... 생활이 아닌 그 느낌... 비로소 살아 있다는 그 느낌과 헤어진 사실이 실은 괴로운 게 아닐까... 생각이 든 것이었다.
생활
생활
생활
쏟아지는 물줄기처럼 영영 이어질 생활과... 어느 순간 배수구 속으로 맴돌며 사라질 허무한 삶... 아니, 삶이 아닌... 생활... 잘 말린 옷을 입고 앉아, 선풍기 앞에서 시원한 참외를 깎아 먹던 그날 저녁을 잊을 수 없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기분이었고, 그저 무료한 마음으로 무료한 드라마를 지켜보던 여름밤이었다. 아무 일 없고, 아무 문제도 없는 생활이지만... 이것이 <삶>은 아니라고 참외를 씹으며 나는 생각했었다.
(이 부분이 내가 바로 그제 야구 관련 포스팅을 올리며 하고 싶은 말이었다! 딱 생활과 삶의 차이만큼의 느낌. 사랑을 하는 이유. 사랑이 없는 생활. 역시 작가는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군만두의 표정도 볼 수 있었다. 평소에는 군만두를 향해 있던 여직원들의 시선도 여배우를 향해 있었다. 용무를 마치고 지하로 내려가면서... 그러고 보니 예전엔 만두 하나만을 메인으로 팔던 만두집이 꽤나 있었다는 생각을 나는 했었다. 드높이 쌓여 있는 찜통과 그곳에서 피어오르던 연기... 그 자체로도 서비스가 아니라 하나의 요리였던 군만두를 나는 떠올렸었다.
평균을 올리는 것은 누구인가, 그로 인해 힘들어지는 것은 누구이며, 그로 인해 이익을 보는 것은 누구인가... 다시 한 번 나는 생각해야 했다. 전기와 전파와 원자력을 쓴다고 해도, 결국 인간은 한 마리의 고릴라와 같은 것이다. 올라간다 한들, 엠파이어스테이트의 꼭대기에서 고릴라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가? 우워어 경치가 좋군... 그런 걸까? 배시시 지하 4층까지 따라내려와 기어코 사인을 받는 군만두를 보며 나는 생각했었다. 세상의 여자들도 실은 킹콩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이봐 콩(Kong), 거긴 너가 살던 집이 아니야. 세상의 만두집들은
사라진 지 오래야.
작가의 말.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가 부끄러워하길 부러워하길 바라왔고, 또 여전히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인간이 되기를 강요할 것입니다.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절대다수야말로 이, 미친 스펙의 사회를 유지하는 동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와와 하지 마시고 예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서로의 빛을, 서로를 위해 쓰시기 바랍니다. 지금 곁에 있는 당신의 누군가를 위해, 당신의 손길이 닿을 수 있고... 그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말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빛을 밝혀가시기 바랍니다. 결국 이 세계는 당신과 나의 <상상력>에 불과한 것이고, 우리의 상상에 따라 우리를 불편하게 해온 모든 진리는 언젠가 곧 시시한 것으로 전락할 거라 저는 믿습니다. ..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는
당신 <자신>의 얼굴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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