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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디스 창고/문학

[밀란쿤데라] 정체성



정체성

저자
밀란 쿤데라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2-05-18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밀란 쿤데라 전집 세계 최초 간행 세르반테스, 발자크, 프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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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7

잘 들어. 우리 종교는 생의 찬미야. '생'이란 단어는 단어 중의 왕이지. 이 단어 중의 왕은 '모험!' '미래!' 같은 거물급 단어에 둘러싸여 있어. '희망'이란 단어도 있구나. 참,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 암호명이 뭔지 알아? 리틀 보이! 이 암호를 생각해 낸 사람은 천재야. 더 좋은 것은 찾을 수 없었을 거야. 리틀 보이, 어린아이, 꼬맹이, 꼬마라, 이보다 부드럽고 감동적이고 미래에 가득 찬 단어는 없지."

 "맞아, 알겠어. 폐허 위에 희망의 황금빛 오줌을 뿌리는 리틀 보이라는 인물로 의인화되어 히로시마 상공을 날아다닌 것은 바로 생명 그 자체란 말이지. 그렇게 해서 전후 시대가 개막된 거고." 그는 잔을 들었다. "축배를 듭시다!"

p.67

아가야, 내 사랑하는 아가야.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사랑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라. 네가 살아 있었더라면 지금의 나처럼 될 수 없었을 거야. 그것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잖니. 아기를 갖고 동시에 있는 그대로의 이 세계를 경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를 내보낸 곳이 바로 이 세계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계에 집착하는 것은 아기 때문이며, 아기 때문에 세계의 미래를 생각하고 그 소란스러움, 그 소요에 기꺼이 참여하며 이 세계가 저지르는 바로잡을 수 없는 바보짓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거란다. 너의 죽음을 통해 너는 너와 함께 있는 즐거움을 내게서 앗아 갔지만 동시에 나를 자유롭게 해 주었지. 내가 사랑하지 않는 이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자유로워졌단다. 내가 감히 이 세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네가 이 세상에 없기 떄문이다. 네가 나를 떠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깨달았단다. 너의 죽음이 하나의 선물, 내가 결국 받아들이고 만 끔찍한 선물이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p.91

오늘날 권태의 양은 과거보다 훨씬 늘었다고 할 수 있지. 과거의 직업은, 적어도 대부분의 직업은 정열적 집착 없이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지. 그들의 땅과 사랑에 빠진 농부, 아름다운 탁자를 만들어 내는 마술사인 내 할아버지, 모든 마을 사람들의 발 크기를 외우던 구두 수선공, 그리고 산지기, 정원사도 마찬가지였어. 당시에는 군인도 아마 정열적으로 살인을 했을 거야. 삶의 의미는 문제되지 않았지. 삶의 의미가 그들의 공장, 그들의 밭에 그들과 아주 자연스럽게 공존했던 거야. 각각의 직업은 그 고유한 직업 의식, 존재 방식을 낳았지. .. 오늘날 우리는 모두 비슷해. 누구나 자신의 직업에 무관심하다는 공통점으로 균일화된 거지. 이러한 무관심이 열정이 된 거야. 무관심이 우리 시대의 유일한 집단적 열정인 셈이지."

p.148

그는 다시 열차에 탔고 여자 검표원이 그에게 미소를 지었고 모든 직원이 웃고 있어서 그는 생각했다. 바로 저런 무수히 복제되고 강화된 미소로 저들은 우리를 죽음의 터널로 발사된 이 로켓으로 인도하는구나. 미국, 독일, 스페인, 한국에서 온 관광객, 이 권태의 전사들은 목숨을 걸고 그들의 대전투에 참전하기 위해 이 로켓에 타는구나. 그는 자리에 앉았고 열차가 출발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샹탈을 찾아 나섰다.

p. 156

"점점 깊이 내려가네요." 겁에 질린 부인이 말했다.

"진리가 머무르는 그곳으로요." 하고 샹탈이 말했다.

"무엇을 위해 사나요,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본질적인 것인가요라는 당신 질문에 대한 답이 있는 곳으로." 하고 를르와가 한술 더 떴다. 그는 부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인생의 본질은 삶이 지속되게 하는 거야. 그건 출산이고 그에 선행하는 성교, 또 그보다 앞서는 유혹, 그러니까 키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 팬티, 멋지게 재단된 브래지어, 그리고 사람에게 성교를 가능하게 하는 모든 것, 다시 말해 먹거리지. 요새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불필요한 성찬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살 수 있는 먹거리, 그리고 먹었으니 배설도 중요하지. 부인, 사랑스러운 부인, 우리 업계에서 생리대와 기저귀에 대한 찬사가 얼마나 큰 자리를 차지하는지 아셔야지. 생리대, 기저귀, 세제, 먹거리. 이것이 인간의 신성한 순환 계통이고 우리 임무는 이를 발견하고 포착하고 정의할 뿐 아니라 그걸 미화해서 노래로 바꾸는 거야. 우리 영향력 덕분에 생리대는 거의 모두 핑크색인데 친애하는 부인, 불안해하는 부인께 내가 적극 권장하는 바인데 바로 이렇게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큰 이런 사실에 대해 숙고해 보시란 말이지."

"참혹해! 참혹하단 말이에요!" 하고 강간당한 여자의 탄식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부인이 말했다. "예쁘게 화장한 참혹이고 우리 모두 참상의 분장사군요!"

p.157

"자유라? 당신의 참혹한 현실을 겪으면서 당신은 불행할 수도 있고, 혹은 행복할 수도 있지. 당신의 자유란 바로 그 선택에 있는 거야. 다수의 용광로 속에 당신의 개별성을 용해하면서 패배감을 맛보느냐, 아니면 황홀경에 빠지느냐는 당신 자유야. 우리 선택은 바로 황홀경이지, 부인."

p.183

나는 조그만 머리맡 스탠드 불빛을 받고 있는 그들 두 사람의 옆머리를 보고 있다. 베개 위에 목덜미를 기댄 장마르크의 머리, 그 위로 십 센티미터쯤 숙인 샹탈의 머리.

그녀는 말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을 거야. 쉴 새 없이 당신을 바라보겠어."

그리고 말을 멈춘 뒤 "내 눈이 깜박거리면 두려워. 내 시선이 꺼진 그 순간 당신 대신 뱀, 쥐, 다른 어떤 남자가 끼어들까 하는 두려움." 하고 이었다.

그는 몸을 조금 일으켜 입술을 그녀에게 대려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그냥 당신을 보기만 할 거야."

그러더니 다시 말했다.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 놓을 거야. 매일 밤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