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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의 ‘라디오화’…이제야 성시경을 제대로 쓰기 시작했다

TV의 ‘라디오화’…이제야 성시경을 제대로 쓰기 시작했다

제이티비시 <비정상회담>의 사회를 맡은 성시경. 제이티비시 제공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라디오는 개그랑은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라디오에서는 유머가 어울리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들 다 웃겨드릴게요’가 아니라, 내가 지금 듣고 있는 바로 당신이랑, 웃기고, 이 사람이 혼자 웃어서 내가 리액션을 주고 그런 매체인데. (중략) 제 생각에는, 셋이 친한 느낌보다 좀더 청취자랑 친한 느낌이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2011년 5월, 전역한 뒤 4년 만에 다시 문화방송(MBC) <황금어장: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성시경은, 자신의 라디오 복귀 때문에 멀쩡하게 잘 진행하던 <옹달샘과 꿈꾸는 라디오>에서 하차를 해야 했던 유세윤을 위로하며 이렇게 말했다. 개그가 아니라 유머가 어울리는 매체, 여러분을 다 웃겨주겠다는 각오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나와 대화하는 당신의 웃음에 적절하게 리액션을 해주겠다는 대화의 의지, 재미가 아니라 즐거움이 있는 공간이 라디오가 아니냐고.

 

라디오 듣는 내게 속삭이듯 “잘자요”
나와 대화하는 디제이 마지막 세대
까칠함 속에 묻어나는 유머와 논리 신변잡기 TV토크쇼에서는 묻혀있던
그의 매력 라디오 닮은 방송서 빛나
윤종신이 이적이 유희열이 그랬듯
이제 성시경의 차례가 온 것뿐이다

 

물론 아예 공개방송을 채택해 방청객들의 박장대소를 유도하며 오후 2시를 호령하는 에스비에스(SBS) <컬투쇼>가 라디오 전체 청취율 1위를 달리고, 라디오에서 하차하자 자신들이 진행했던 프로그램 이름을 고스란히 들고 와 팟캐스트에서 더 시끌벅적하게 떠들기 시작한 옹달샘 트리오의 <옹달샘과 꿈꾸는 라디오>가 팟캐스트 상위권을 찍는 시대에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런 시절이 있었다. 라디오 부스를 찾아온 게스트와 즐겁게 수다를 떨고, 음악이나 영화, 책, 연애나 인생 따위에 대해 전문적인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지금 이 방송을 듣고 있는 당신은 안녕하시냐는 듯 살갑게 물어오는 디제이(DJ)들이 심야 라디오 시간대를 장악하던 시절이 말이다. 고 정은임 아나운서가 고 김주익 열사의 이야기로 라디오 오프닝을 열며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라며 듣는 이들의 심장을 때리는 안부를 묻던 시절이. 이문세가 <별이 빛나는 밤에>를 떠나며 마치 연인과 이별하는 남자처럼 울먹이던 마지막 방송을 들으며 청취자들도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던, 모든 방송이 결국엔 디제이인 당신과 청취자인 나의 대화이던 시절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성시경은 그 시절의 마지막 세대였다. ‘잘 자요’라는 유행어를 남겼던 <푸른 밤, 그리고 성시경입니다>나 최근까지 진행해왔던 <에프엠 음악도시>에서, 성시경은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시시비비는 명확하게 따지는 까칠함, 싫은 건 싫은 거라고 말할 수 있지 않으냐고 묻는 개인주의적 성향과 그럼에도 행간마다 묻어나오는 다정함으로 청취자들을 사로잡았다. 라디오는 그가 미지의 청취자와 대화하며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었고, 덕분에 매일 밤 그와 라디오로 교감해 오던 청취자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가 “이 시대 최고의 댄스곡은 모다(뭐다)?”라는 턱도 없는 수식어로 자신의 댄스곡 ‘미소천사’를 소개했던 과거 때문에 ‘모다시경’으로 불리며 동료들의 놀림을 받는다는 거, 그걸 자조할 수 있을 만큼 유머감각이 출중하다는 거, 자신이 은근히 야한 이야기를 즐긴다는 사실을 흉하지 않게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인 동시에, 제 의견을 논리적으로 조곤조곤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걸, 티브이만 몰랐다. 티브이는 성시경의 귀공자풍 외모와 특유의 호흡이 깊은 발라드 등에 천착하며 연예인 연애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그를 출연시키고, 뜬금없이 에스비에스 드라마 <때려>(2003)의 조연으로 캐스팅해 팔자에도 없는 연기를 시켰다.

 

 

그러고는 그가 남긴 유행어 ‘잘 자요’는 느끼해서 남자들이 그를 싫어하더라는 이야기, 혹은 지나치게 까칠해 사람들이 재수없어하더라는 이야기 따위를 가십성 토크쇼에서 써먹곤 했다. 그 시절 거론되던 에피소드들은 또 하나같이 왜 그렇게 까칠한지, 티브이에서 소개된 성시경은 청취자가 보낸 유머 사연이라고 해도 자신이 읽었을 때 재미가 없다 싶으면 “이게 뭐가 재미있죠?”라고 되묻는 못된 디제이였다. 거기에 토크쇼에 나와 제 입으로 “유승준에 대한 사람들의 국민정서를 가지고 나라가 그의 입국을 막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건 잘못된 판단이다”라고 말해버렸으니, 하룻밤 안에 십만 안티가 생겼다던 말도 과장은 아니었으리라. 그 시절에도 성시경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하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처럼 그 말과 행동으로 대중을 열광시키진 못했다. 물론 ‘몰랐다’고 이야기한다면 티브이 종사자들로선 좀 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티브이 토크쇼의 주류는 연예인들이 나와 자신들이 경험한 재미있는 에피소드나 신변잡기를 이야기하는 종류의 쇼들이었다. 한국방송(KBS) <서세원쇼>부터 시작해 문화방송 <놀러와>, 에스비에스 <강심장>에 이르기까지, 연예인들은 자신의 이야기로 사람들을 웃기고 울렸으며, 시청자들은 그 이야기들을 일방적으로 소비했다. 문화방송 <황금어장: 라디오 스타>가 티브이 토크쇼로는 이례적으로 라디오 부스 같은 세트나, 디제이들끼리 말을 놓으며 사담을 나누는 듯한 왁자지껄함으로 격을 허물긴 했지만, 여전히 불러온 게스트들의 이야기에 천착하는 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던 <황금어장: 무릎팍도사>에서 성시경의 말에 유세윤이 답했던 것처럼, “여긴 티브이고, 티브이는 유머가 아니라 개그가 중요”했으니까. 말하는 내가 보는 당신과 ‘교감’하고 ‘소통’하고 있다는 느낌보단, 자기들끼리 재미있고 신나 보이는 것을 보는 이들에게 ‘전달’하는 게 중요한 매체였던 셈이다. 그랬으니 성시경 특유의, 상대와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듯한 대화의 매력을 티브이에서 살리는 건 어려워 보였을 것이다. 바뀐 건 성시경이 아니라 환경이었다. 연예인들의 신변잡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종류의 토크쇼들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 한국방송은 일반인들의 사연을 받아 읽어주고 고민을 상담해주는 토크쇼 <안녕하세요>를 선보였다. 사연을 보낸 당사자와 엠시(MC)들이 충분히 소통하고 대화하는 게 중요한 이 쇼가 성과를 거두기 시작하면서, 같은 시간대 토크쇼의 맹주였던 <놀러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대신 ‘보는 나’와 ‘말하는 당신’ 사이의 연대감을 중요시 여기는 종류의 쇼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엠비시 에브리원(MBC every1)의 <주간 아이돌>에 출연한 아이돌들은 시청자들이 육성으로 남긴 전화 사서함 리퀘스트에 답을 해준다. 유희열이 진행하는 티브이엔(tvN) <에스엔엘(SNL) 코리아> 속 토크쇼 ‘피플 업데이트’는 실시간으로 그날의 호스트에 대한 설문조사를 시행해 토크쇼 중 발표한다. 4명의 메인 엠시 중 한 명으로 성시경을 데려온 제이티비시(JTBC) <마녀사냥>은 청취자들의 연애 사연을 읽어주고 엠시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고민 상담에 충실하게 답해주던 심야 라디오의 정취를 빼다 박았다. 라디오가 더 이상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때나마 라디오만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것들이 티브이로, 유튜브 동영상 방송으로, 팟캐스트로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변화가 오자, 라디오를 듣던 이들만이 이해하던 성시경의 매력이 티브이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마녀사냥>으로 날아온 사연을 읽고, 함께 진행하는 엠시들과 짓궂은 농담을 나누고, 애매한 연애 사연에 대해 나름의 답을 내려주고, 그러면서도 어디까지나 자신의 의견임을 전제로 하는 것을 잊지 않는 능란한 진행. 최근 시작해 화제가 된 제이티비시 <비정상회담>에서 국적만큼이나 의견들도 제각각인 11명의 외국인 청년들과 대화를 나누며 각자의 의견을 이해하고 정리해나가는 논리정연함이나, 과열된 분위기를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내는 것으로 풀어내는 공감의 능력까지. 원래 사람이란 건 잘 바뀌지 않는다. 성시경도 그렇다. 그가 갑자기 더 매력적인 사람이 되어 졸지에 엠시계의 블루칩이 된 것은 아니다. 그저 티브이라는 플랫폼이 자신들의 구태의연함을 벗기 위해 역설적으로 더 오래된 매체인 라디오로부터 답을 찾자, 티브이 시청자들이 오랜 시간 라디오를 묵묵히 지켜왔던 이들의 새삼스러운 매력에 눈을 뜬 것이다. 윤종신이, 이적이, 유희열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성시경의 차례가 온 것뿐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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