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누구도 웃지 않으리
영원한 욕망의 황금 사과
히치하이킹 게임
콜로키움
죽은 지 오래된 자들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에게 자리를 내주도록
이십 년 후의 하벨 박사
에드바르트와 하느님
누군가 나에게 '네가 읽은 쿤데라의 소설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을 소개해줘"라고 물어온다면 나는 <농담>을 꼽을 것이고, 그 사람이 재차 '그럼 그의 가장 재미있었던 책을 추천해줘'라고 묻는다면 주저없이 이 단편선을 택하겠다. 재미있어서 읽히기도 잘 읽힌 데다가,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역시 소설의 가장 첫째 덕목은 '재미'지!"
그의 단편들 속 인물들은 운명에 배신당하고,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하며, 또 간혹은 그 어설픈 오역이 서로를 사랑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인물들은 세상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어김없이 실패하고, 자기 자신, 타인을 이해하려고 하지만 이조차 늘 실패한다. 진지하게 해석되는 상황이 실은 하나도 진지하지 않은 무의미한 실수이기도 하고, 하나의 농담-실수와 같은 무의미한 것들이 내 인생을 뒤바꿀 결정적인 사건이 되기도 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어긋나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이 땅이란 수많은 세계가 겹치는 곳이다.
그렇게 연속적으로 이뤄지는 세상과 타인에 대한 오역은 말도 안되게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만들어내며, 나는 그 오역들 사이의 거리를 고무줄처럼 팽팽하게 밀고 당기는 작가의 농담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농담의 연속, 농담의 조각들. 그 농담의 끝에서 독자는 질문하게 된다. 이 웃기고 웃긴 이론들 사이에서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삶은 엇갈림과 오역의 연속이다. x자와 =자와 쏠림이 공존했던 '사랑의 짝대기'(사랑의 스튜디오라는 프로그램이었다)와 같이 예측할 수 없도록 얽힌 불이해의 결정체다.
영화보다는 연극에 가까운 단편들이다. 이야기는 거의 주인공들의 대화와 서로에 대한 생각, 스스로에 대한 생각만으로 이루어져있다. 특히 <히치하이킹 게임>이나 <죽은 지 오래된 자들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에게 자리를 내주도록>, <콜로키움>이 재미있었다. 모든 단편은 이목구비가 뚜렷한 배우처럼 이해하기가 쉬웠다. 게다가 거기에 더해 독창적인 매력과 완벽한 연기력까지 겸비한.
그런데 민음사.. 세상에... 맞춤법 실수가(심지어 기본적인 것들) 많아서 읽으며 좀 흥이 빠졌다.
<누구도 웃지 않으리>
p.12.
우리는 눈을 가린 채 현재를 지나간다. 기껏해야 우리는 현재 살고 있는 것을 얼핏 느끼거나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나중에서야, 눈을 가렸던 붕대가 풀리고 과거를 살펴볼 때가 돼서야 우리는 우리가 겪은 것을 이해하게 되고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날 저녁 나는 성공을 위해 축배를 든다고 생각했지 그것이 내 종말의 장엄한 개막식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p.56.
나는 문득 깨달았다.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모험이라는 말에 안장을 맸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스스로 방향을 잡아 말을 달린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환상일 뿐임을. 그 모험들은 어쩌면 전혀 우리 것이 아니라 어떠헥 보면 외부로부터 부과된 것임을. 그 모험들은 전혀 우리를 특징지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그 모험들의 기이한 흐름에 전혀 책임이 없음을. 그 모험들 자체가 알 수 없는 어떤 이상한 힘에 의해, 알 수 없는 어떤 곳에서부터 다른 어디로 향한 채 우리를 이끌어 간다는 것을.
<영원한 욕망의 황금사과>
p.86.
그래서 우리는 자리에 앉으러 갔고, 온 얼굴에 햇살을 받으며 뒤로 기분 좋게 몸을 젖히고, 잠시 아무 생각 없이 주변 세상이 저 혼자 돌아가게 두었다.
p.92.
"무엇을 말 그대로 믿게 되면 믿음은 이것을 밑도 끝도 없이 밀고 나가. 어떤 정치를 정말 옹호하는 사람은 이 정치의 궤변을 절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단지 그 궤변 뒤에 감춰진 실제 목적을 파악하는 거야. 왜냐하면 정치적 클리셰와 궤변들은 사람들이 믿으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거든. 그것들은 오히려 암묵적으로 합의된 핑계 역할을 하지. 그걸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순진한 이들은 언젠가 모순을 발견하게 될 거고, 저항하게 될 거고, 결국은 치욕스럽게 이교도나 배교자가 되고 말아. 과도한 믿음은 절대 좋은 걸 가져올 수가 없어. 종교나 정치 시스템에서만 그런 게 아니야. 우리 시스템, 그 여자애를 끌어들이려고 사용한 그 시스템에서도 마찬가지라고."
p.98.
나는 유다 이스가리옷을 생각했다. 한 종교 서적 필자가 말하길, 그가 예수를 배신한 것은 바로 예수를 한없이 믿었기 때문이다. 그에겐 기적을 기다릴 인내심, 기적을 통해 예수가 모든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신적 능력을 드러내길 기다릴 인내심이 없었다. 그는 그러니까 결국 예수가 행동하지 않을 수 없게끔 하기 위해 그를 로마군에게 넘겼다. 그는 그의 승리의 시간을 앞당기고 싶었기 때문에 그를 배신했던 것이다.
...
과연 나 자신은 젊음이 의미하는 이 행동들을 언젠가 포기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것들을 모방하는 데 족하지 않는다면, 내 바른 생활 속에 이 비상식적인 행동을 위한 작은 영토 찾기를 시도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면 나는 다른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것이 쓸데없는 게임이면 어떻단 말인가? 내가 다 알고 있으면 어떻단 말인가? 단지 아무 소용없다는 이유로 나는 이 게임을 포기할 것인가?
<히치하이킹 게임>
p.127.
아가씨는 자기 입에서 그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이런 말로 ㅡ 사실 별 대수롭지 않은 말이지만 ㅡ 그를 경악하게 만든 것이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 단어를 요염하게 강조해서 말한 것보다 자신이 연기하는 인물을 더 잘 표현해 주는 것은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 그녀는 만족스러웠고, 최고의 기분이었다. 그녀는 이 게임에 매료되었다. 이 게임은 그녀에게 완전히 새로운 감각들을 가져다주었다. 예를 들어, 책임질 필요도 없고 근심 없는 무사태평한 느낌 같은 것.
늘 다가올 다음 순간이 두려워 떨던 그녀가 갑자기 전혀 긴장 없이 편안한 느낌이 되었다. 그녀가 갑자기 풍덩 빠져든 다른 여자의 삶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삶, 개인을 규정하는 아무 것도 없는 삶, 과거도 미래도 없는 삶, 아무 약속도 지킬 필요 없는 삶이었다. 히치하이킹하는 여자가 되어 그녀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 허락되었다. 무슨 말이나 다 하고, 무엇이든 다 하고, 무엇이든 다 느낄 수 있었다.
<콜로키움>
p.151.
"...그런데 있잖아요, 어쩌면 바로 그래서 제가 그녀를 거부하는 건지도 몰라요. 필연성에다 대고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죠. 인과 법칙에 다리를 걸고 싶은 거예요. 우주의 흐름이 그 음울한 예측 가능성을 자유의지의 변덕으로 실패하고 싶은 거 말이에요."
p.163.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할 때 그녀의 엉덩이는 더 이상 엉덩이가 아니라 슬픔 그 자체, 춤추며 방안을 휘젓고 다니는 기막히게 근사한 모양의 슬픔이었다.
p.195.
모든 것의 불확실성
<죽은 지 오래된 자들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들에게 자리를 내주도록>
**무척 마음에 드는 단편.
p.237.
그 빛이란 이런 것이다. 그녀에겐 삶에 우선하여 기념물을 앞에 갖다 놓을 그 어떤 이유도 없다. 자기 자신의 기념물도 그녀에게는 단 하나의 존재 이유만 있을 뿐이다. 무시당한 자신의 몸을 위해 지금 그녀는 그것을 악용할 수 있다. 곁에 있는 남자가 마음에 들고, 젊고, 또 이 남자가 아마도 (심지어 거의 확실히) 그녀 마음에 들고 가질 수 있는 마지막 남자일 테니까, 그리고 그것만이 중요하니까. 그러고 나서 그녀가 그에게 혐오감을 주고 그의 머릿속 그녀의 기념물을 망가뜨리게 된다 해도, 이 남자의 생각과 기억이 그녀 바깥에 있는 것처럼 이 기념물은 그녀의 바깥에 있는 것이며, 자신의 바깥에 있는 것은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으므로 그녀는 개의치 않는다. "엄마, 이렇게 말한 적 없었잖아!" 아들이 소리치는 소리가 드렸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미소 지었다.
"당신이 맞아요, 뭐 하러 제가 뿌리치겠어요?" 이렇게 다정하게 말하고 그녀는 일어섰다. 그다음 천천히 원피스의 호크를 끄르기 시작했다. 저녁은 아직 멀었다. 이번에는 방이 아주 아주 환했다.
<에드바르트와 하느님>
p.333.
그러나 삶에는 늘 이런 일이 일어나는 법, 누가 슬그머니 무대 장치를 바꿔 놓았다고는 짐작도 하지 못하고, 그래서 다른 연극이라는 건 꿈에도 모른 채 계속 연기를 하게 되는 그런 일 말입니다.
p.335.
"예, 여기 아주 좋습니다." 에드바르트는 이렇게 말했는데, 갑자기 확 불편해졌기 때문에 꽉 잠긴 목소리로 말했지요. 코냑 병, (첫 번째 방문 때 그가 신중하지 못하게 요구했던, 그런데 위협적으로 신속하게 탁자 위에 모습을 나타낸 이 술병) 원룸 아파트의 사방 벽, (공간을 점점 더 좁게, 점점 더 닫힌 곳으로 경계 짓는 벽) 교장의 독백, (점점 더 개인적은 주제로 집중되는 독백) 그녀의 시선, (그에게 위험하게 고정된 시선) 이 모든 것이 그에게 프로그램 변경을 알아차리게 했습니다. 그는 이제 발전이 불가피한 상황에 놓였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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