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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디스 창고/미술

[홍순명, 고산금 전시] 전복, 그 낯선 감각의 반짝임

2012년도 2학기

한국현대미술감상


전복, 그 낯선 감각의 반짝임

홍순명의 <Sidescape>, 고산금의 <Homage to You> 를 보고


우리는 과연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을 보고 사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이 질문에, 특히 풍경에 관련해서는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보는 행위는 결코 순수한 우리의 의지만 포함하지 않는다. 우리는 수많은 의도와 목적 속에서 무언가를 본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사진일 것이다. 우리는 신문, 인터넷, 잡지 등 많은 매체를 통해 풍경을 접하고 있는데 사실 이 사진은 굉장히 의도적이다. 먼저 다른 많은 풍경들 중 그 모습을 프레임에 담기로 ‘선택’한 사진작가의 의도, 그리고 사진의 포커스를 정하고 있는 제목과 사진의 초점, 또 작가가 전달하려는 주제의식을 통해 우리는 대상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비슷한 의미로 또한 우리는 습관적으로 읽는다. 우리는 주변에서 많은 글자를 접한다. 신문기사, 노래 가사, 책, 법전. 우리는 이들을 보자마자 텍스트라는 존재로 규정하고 읽어버린다. 그들의 구성이나 반짝, 반짝 빛나는 하나하나의 존재들을 인식할 찰나도 남기지 않고 말이다. 홍순명, 고산금 작가는 이러한 우리의 습관적인 읽는, 보는 행동에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그리고 기존에 종종 무시되었던 존재들의 의미와 아름다움, 중요성을 본다. 두 사람은 모두 중심에서 벗어나 모두 ‘주변’을 본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 위에 있다.

먼저 홍순명 작가의 전시를 보자. 사진은 보통 있는 그대로를 담아낸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작가는 우리의 사고를 뒤집는다. 우리는 사실 보이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보여주는 것만을 본다는 것이다. 특히 수많은 기사 사진이 그렇다. 우리는 기자가 적어 놓은 제목에, 그가 설정한 구조를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포커스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작가의 의도에 포함되지 않은 많은 존재들은 무시되기 일쑤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존재가 무시될 수 있는가? 홍순명 작가는 오히려 이 주변이 오히려 세상을 잘 보여줄 수 있다고 본다. 때문에 그의 전시에서는 모든 ‘주변’이 캔버스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그의 아이디어는 주변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전시의 제목도 Sidescape다. 그는 인터넷이나 신문, 잡지 등 인쇄물에 보도된 사진 이미지에서 부분만을 추출해와 자신의 그림 속에 담아낸다. 그런데 그 부분을 보면 전체 사진이 원래 담고 있던 주제를 전혀 추측할 수조차 없다. 그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그 자리에 존재하는 모든 '주변'들만을 그리기 때문이다. 반면 그의 작업에서 기존의 ‘중요하다고 의미가 부여된 경치’들은 저 뒤편으로 밀려난다. 그는 사람들이 풍경을 바라보는 시선의 이면을 파헤친다. 그리고 이념화되고 갇혀있던 작은 삶의 조각들을 끄집어내 그들의 의미를 조명한다. 이 때문에 기존에 중심이 아니었던 선인장이나 파도, 모래사막, 나무, 샹들리에 따위가 중심으로 튀어 오르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중요한 국가적 행사가 열리고 있는 기사 사진에서 그 배경의 샹들리에만을 그렸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식 사진에서는 국화가 담긴 병을 주제로 선정해 그렸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사물이 아니다. 산불 현장은 그의 손을 거쳐 나무 사이로 비치는 빛나는 촛불이 되기도 했다가 일출의 현장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는 사진에서 나타난 주변에서 인간의 의도성, 이념성을 모두 배재하고 순수한 풍경 그 자체만을 드러낸다. 특히 그의 주제의식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은 <Kandahar. April 2. 2009>이다. 그는 벽에 기대고 있는 전쟁 중인 한 군인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그렸지만 작품에서는 사람의 형체를 완전 지워버렸는데, 이로써 그 사진의 배경은 사진과 달리 어떠한 인간의, 주제적 한계를 강요당하지 않은 가장 순수한 형체를 띠게 됐다.

그러나 한편 그 광경은 불완전하기도 하다. 그의 그림들을 보면 그 대상들이 모두 약간씩 물감이 흘러내린 듯한 형체를 띠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 윤곽선도 정확하지 않아 몽환적인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작품들은 오히려 모든 윤곽선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사진보다 세상의 풍경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다. 세상 자체가 뚜렷한 윤곽선을 지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현실은 항상 확실하지 않고 경계가 불분명하다. 어느 누가 진실을 안다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모든 진실과 현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며 그 과정 속에서만 존재한다. 이러한 면에서 그의 작품은 사진보다도 더 사진 같으면서도 사진에서 나타나는 모든 확실성, 주제성, 포커스로 강조된 중심성을 부정한다.

이제 고산금 작가의 전시 <Homage to you>로 가 보자. 우리는 전시장 안에 들어가는 순간 모두 문맹이 된다. 분명 우리가 늘 접하는 형태의 텍스트들이지만 그들은 모두 낯설다. 우리가 모르는 언어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진주라는 재료를 사용해 한 묶음의 텍스트들을 창조해 냈는데 그녀가 만든 모든 법전, 책, 그리고 이를 이루고 있는 이름 모를 글자들 앞에 우리는 소외된다. 또 알 수 없는 그녀의 언어 앞에 우리는 경이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모르는 것에 대한 아름다움. 우리는 그 텍스트의 내용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처음으로 그 구성과 그 형태 자체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소설, 시, 신문, 철학서, 대중가요 가사, 법전 등 출판매체를 읽고 작업실에 앉아 자신이 읽은 글의 일부나 인상적인 부분을 필사한다. 그리고 이 필사 과정에서 사용되는 재료는 인공 진주이다. 그녀는 텍스트에서 글자 하나에 해당하는 공간을 진주 하나로 메우고 텍스트 자체를 진주들로 꾸며낸다. 늘상 우리 곁에 같이 있었던 소설책, 노래 가사, 법전 등은 그녀의 손을 거쳐 낯선 존재로 재탄생했고, 우리는 그 속에서 소외감과 함께 아름다움, 경외감을 동시에 느낀다.

그녀의 작품은 그 작품 자체가 보여주는 느낌 외에도 사회적 고발을 드러내기도 한다. 사실 사회 속에서 텍스트라는 존재, 또 그것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로 그 사회의 중심부에 있느냐와 연관될 수 있을 것이다. 저소득층, 혹은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법전 같은 경우가 가장 대표적일 것이고, 뉴욕 타임즈의 기사나 소설, 미술에 관련한 기사, 시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 자신은 인터뷰 기사에서 자신의 작품들이 사회참여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는 점을 부인했지만, 적어도 관람객의 눈에 그녀의 작품 속 진주들은 기존의 법체계나 문화체계로 표상되는 다양한 텍스트에 소외된 사람들의 눈물, 또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탄생하는 진주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가 작업을 한 <Fly - Epik high>의 가사의 한 구절이 마음에 와 닿았다. “눈을 뜨고 바라봐도 빛은 없고/ 꿈을 꾸며 살아가도 길은 멀고/ 내 뜻대로 가도 숨을 몰아쉬었고/ 진실을 말해도 돌아섰죠/ 아직도 찾는 것을 못 찾았고/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못한다고/ 낙오감에 빠져도 Never die/ ... / 눈을 뜨며 살아감에 보여 희망의 연기가/ 모두 털어 날려버려 비관의 먼지 다/ 역시 나도 때론 괜한 겁이나/ 천천히 가 왜 꿈을 쉽게 버리나/ 때론 낮게 나는 새도 멀리 봐/ 어두운 밤일수록 밝은 별은 더 빛나”

그녀의 작품 속에서 우리는 존재의 빛남을 본다. 그리고 그 속에는 인간에 대한 애정, 관심, 그리고 공감이 녹아있다. 그녀의 작품 속 언어는 문단의 형태, 배열, 작은 띄어쓰기 하나, 진주 한 알까지도

모두,

반짝 반짝 빛난다.

예술가는 무미건조한 일상, 권태롭고 관성적인 일상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찾아내 보여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두 작가의 작품은 세상을 낯설게 바라보게 한다. 누구나 진실이라고, 의심 없이 믿고 있는 것을 믿는 것은 쉽다. 그러나 홍순명, 고산금 작가는 사람들의 이 권태로운 의식을 전복시키려 한다. 때로는 뭉뚱그려지기도 하고 돌연 반짝반짝 빛나기도 하는 그런 낯선, 느낌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