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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디스 창고/문학

[한유주] 얼음의 책


얼음의 책

저자
한유주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09-06-0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모래 위에 곧 사라질 글자들… 서서히 녹아 내려 흔적 없이 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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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주는 그녀의 소설 『얼음의 책』에서 기존의 서사, 이야기의 틀을 깨고자 한다. 사건이나 분절된 시간이 일정한 규율에 맞춰 서술된 것만을 소설이라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야기 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또 그것이 누구의 입을 통해 그려지든 소설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허구0」에서 가장 먼저 찾을 수 있는 특징은 이야기를 서술해 나가는 방식에 있다. 소설 속 서술자는 작가 자신이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열하듯 건조하게 서술해 나간다. 극적인 사건도, 뚜렷한 줄거리도 없다. 심지어 서술자가 생각을 번복하는 과정까지도 이야기로 풀어진다. 본래 기존의 소설에서 작가는 일반적으로 뚜렷한 사건을 지닌 이야기를 상상해 나간다. 그러나 이에 반해 한유주는 소설이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지 않더라도 이야기되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작가는 사건, 서사 자체를 부정하는 데 이른다. 서사란 기본적으로 사건이라는 내용을 그 바탕으로 하는데, 작가는 그 서사의 필수 요건인 사건이 존재하지 않아도 이야기가 진행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녀는 서사와 반서사에 대한 비유로 박제와 화석을 들고 있다. 먼저 박제란, 보여주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순간을 재현한 서사를 뜻한다. 반면 화석은 있는 그대로 시간 속에 흐름을 내맡겨, 뚜렷하고 극적인 내용은 없지만 시간의 흐름으로서 존재하는 반서사를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설 속에 자주 등장하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 식의 문장은 반서사적으로 그 일이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이야기는 그 자체로 진행될 것임을 암시한다. 또한 이 소설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다른 하나의 주제는 연속성이다. 이야기는 지금까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시간을 지배하는 방법으로써 여겨져 왔다. 그리고 이러한 정의 아래 시간은 요약되고 분절된다. 그러나 한유주는 어떤 이야기라도 완전히 요약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기, 혹은 일어나지 않기까지에는 끝없이 연속적인 생각과 행동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편 「재의 수요일」에서는 사건의 부재가 가장 두드러진다. 이 소설에는 특히 ‘~기를 원하지 않았다.’ 혹은 ‘~이 없었다.’라는 구절이 자주 등장하는데, 예를 들어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그 옆의 향수 가게가, 그 옆의 아랍인 상점이 모두 타버리기를, 모두 타서 재로 변해버리기를 원하지 않았다.’라는 식의 문장을 마주하게 된다. 보통 일반적인 이야기라면 어떠한 사건이 있어 인물이 그 사건을 해결해 나가거나, 사건으로 인한 뚜렷한 결과를 만들어 내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건의 부재로 진행된다. 소설의 시점 또한 사건의 발생을 억제한다. 이 글은 1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서술자인 여자가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남자의 일상, 생각까지 모두 알고 있다. 본래 사건은 서로가 서로를 모를 때, 서로를 알기 위해 소통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상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더 이상 소통 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둘 사이에서는 어떠한 극적인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이 소설은 「허구0」과 같이 이야기의 연속성에 대해서도 짚어내는데, 작가는 직접 일어나는 인물의 행동뿐만 아니라 그 행동과 말을 하기까지 진행되는 생각의 흐름까지 이야기로 풀어낸다. 이는 기존의 이야기와 같이 분절된 행동, 사건의 나열이 정확히 요약해 내지 못하는 부분을 그려내고, 또한 그 행동과 사건 사이사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합쳐질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렇듯 한유주의 두 소설 모두 기존의 서사를 인위적으로 꾸며진 존재라고 본다. 따라서 작가는 소설에서 말을 포장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그려내려 한다. 물론 시간과 이야기는 전부 서술될 수 없이 연속적이고 구체적이기에 한유주의 이 시도는 점진적인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스스로 자각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서사의 틀에 의문을 던진다. 「허구0」이라는 제목에서 나타나듯 한유주에게 있어 허구, 소설은 0에서 영원까지 지속된다. 분절된 시간의 단면만이 소설이 아니고 모든 시간 전체가 연속적인 이야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소설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여 왔던 서사의 개념을 다시 한번 고민하게 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