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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디스 창고/문학

[내 인생의 책 10권] 3. 에쿠니 가오리 - 냉정과 열정사이


냉정과 열정사이(ROSSO)

저자
에쿠니 가오리 지음
출판사
소담출판사 | 2000-11-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하나의 사랑, 두 가지 느낌! 하나의 사랑을 두명의 남녀작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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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책장에서 꺼냈다. 책등의 색이 많이 바래있다.


일본 소설은 늘 반듯하고 정갈하다. 그게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이다. 어딘가 흐트러진 면이 없어서 가짜같다는 인상을 준다. 그래서 항상 곡선적이고 제멋대로인 삶의 행간을 잘 읽어내지 못한다는 생각도 든다. 인생에 직선이란 없으므로. 그래서 지금은 딱히 전형적인 일본체 소설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고등학교를 다니는 3년 내내 나의 정서를 지배했던 건, 아마도 이 책이 지니는 축축한 슬픔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시의 나는 오글거리게도 살아가는 데 있어 정말 유용하고 진리에 가까운 어떤 것을 깨달았는데, 그건 슬프고 우울할 때면 아예 감정의 밑바닥까지 가야한다는 거다. 애매하고 어설프게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면 오히려 슬픔은 더 겉잡을 수 없이 커진다. 마음을 내려놓고 슬픔의 끝바닥까지 갈 때, 마음에 내리던 비는 도리어 긋는다.


비가 오거나 외롭거나 살기가 싫어지는 날이면 따뜻한 차(고등학생 때의 나는 차를 무척 좋아했다. 그 중 가장 좋아했던 건 국화차다.)를 한잔 가져다가 놓고 외워버릴 듯 익숙한 문장들을 읽고 또 읽었다. 축축하게 습기가 어린 문장들을 읽어내려가다보면 왠지 모르게, '그래 이해받지 못하는 게 당연한거야' 하고 슬픈 마음을 털어버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실 소설 속 주인공과 내가 비슷한 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다. 내가 아오이처럼 마른 것도 아니고, 정갈하거나 목욕 중독자도 아니고, 그런 끔찍한 일을 겪은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의 외로움이 너무나 이해가 돼서. 아마 그 이유로 이 소설을 읽고 또 읽었던 것 같다고 생각한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벽을 세우고, 이만큼 까지의 금을 긋고 외로움을 숙명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조용한 여자의 삶이 안쓰러우면서도 약간의 동류의식을 느꼈다.


웹툰 밤의 베란다를 보며 느끼는 것도 그런 류의 감정이다. 외로울 수밖에 없고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걸 확인받는 기분이라 오히려 위로가 된다. 이런 삶의 핵심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또 있구나,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이런 걸 보며 외로워하고 있겠지. 차이점이 있다면 밤의 베란다에는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을 여러 포르노적인 대사들이 등장해서 더 극적이다. 상처받은 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것이 현실의 세계에선 전혀 있을 수 없는 과장과 환상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맨날이고 그런 대사에 위로받는다.


냉정과 열정사이의 아오이 편은 그런 위로는 절대 해주지 않지만, 그냥 그대로 내려놓음으로써 오히려 더 위로가 된다. 상처로 인해 사라진 과거의 열정과, 결국 잃어버린 그 뜨거움은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 원상복귀시킬 수는 없다는. 오히려 그런 사실적인 조언이 가끔 더 희망적이기도 하다.


이탈리아에서 두오모에 올랐다.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내려도 봤다. 이 책을 안읽은지도 꽤 됐으니 아오이의 기분까지는 기억이 안 났다. 어떤 기분이었을까. 세트로 나온 준세이의 책(츠지 히토나리)은 별로였다. 영화는 등장인물의 얼굴 부터가 나의 상상과 괴리가 커서 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