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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디스 창고/문학

[김훈] 공무도하.


김훈의 문장을 읽어 내려간다. 바싹 말라버린 각질같이 건조한 문장이 나를 따라온다. 문장들은 무심하게 내 안에 와서 박힌다. 박혀서 나가질 않는다. 마음이 아린다. 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다. 각질처럼 버석한 문장에서 왜 무좀처럼 짓무른 감정이 생겨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설명할 수 없다는 건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 법도 어느 사람도 어느 뇌도 어느 체계에도 나를 설명할 수 없다. 무좀처럼 짓무른 감정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다. 나는 나를 증명할 수 없다. 나는 나를 확신할 수 없다. 그렇게 감정은 벗겨진 각질처럼 으스러진다. 사라진다.


"ㅡ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시급한 현안문제다."


소설 공무도하는 확실성과 사실성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은 기자인 문정수다. 마치 기사를 쓰듯 건조하게 읊어나가는 그의 말 속에는 사실과 사실이 되지 못한 이야기들이 산재한다. 사실은 사실이 되지 못하고 사실은 거짓에 뒤덮이며 그 사실을 다른 거짓이 뒤덮는다. 


기자가 싫다. 이번 학기 수업을 들으면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사실로 입증되지 못하는 모든 존재의 조각들은 기사의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0과 1로 이루어진 그 세계에선 완벽하게 입증될 수 있는 사실만이 가치를 지닌다. 이번 학기 수업에서 나는 B+을 받았고, 수업시간에 받은 교수님의 칭찬을 되새겨 봤을 때 내 깎인 점수는 교수님이 나중에서야 발견한, 그 빌어먹을 '팩트의 정확도' 때문이라는 걸 안다.  점수들을 고려해봤을 때 문의메일을 보내도 납득할만한 성적이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난 B다. 알고 있었지만 그저 내가 B라는 사실이 입증되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었다.


기사의 세계에선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들은 철저하게 무시당한다. 무언가를 입증한다는 것은 진실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대표적인 수단으로 작용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세상에서 그 공식은 곧잘 성립하지 않는다. 진실이라 확신할 수 없는 진실을 거짓이 덮고, 진실이 된 그 거짓을 또 다른 거짓이 덮는다. 거짓과 위선은 증폭한다. 사람들의 이기심을 품고 증폭한다. 악력이 되어, 누군가의 신장을 사기 위해 건네는 5천만 원이 되어, 결혼할 여자를 사기 위해 바다를 건너는 남자가 되어, 소녀의 죽음마저 돈으로, 어설픈 구호로 덧씌우는 사람들이 되어 진실을 갉아먹는다.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의를 위하는 일은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어느 누구에게도 입증될 수 없다. 법은 법이기 때문에 법인 것이고 사실은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사실이 되는 것 뿐이다. 사실은 결코 동등하지 않다. 그저 장철수의 말처럼 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 


진실은 존재하지 않음에도 진실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건 문정수의 무좀과 같은 가려움 때문이다. 사실이 사실이라 입증되지 않았는데도 내가 사실이라고 느끼는 것은 배워먹지 못한 나의 논리성 때문이다. 벽돌 벽과 같이 단단한 스트레이트 기사 사이에서 부스러지는 작은 모래가루 때문이다. 말라버린 각질 사이가 가려운 까닭이다. 가렵다. 나열된 사실. 입증. 확실. 사실. 증거. 경찰. 법. 죄. 범죄 따위의 벽돌 같은 글자를 읽어 내리다 보면 가려워진다. 김훈의 딱딱한 문장은 나를 가렵게 했다. 그가 기자생활을 할 때의 모습을 묘사한 글이 떠오르지만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미간에 주름을 채우고 원고지에 글자를 넣는 그의 모습을 뻑뻑대는 담배 연기가 흩뜨린다.


324페이지. 책을 덮는다. 작가의 말을 읽고 나서 불현듯 가려워진다. 나는 조급하게 이마를 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