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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디스 창고/문학

[내 인생의 책 10 권] 1. 트레이시 슈발리에 - 진주 귀고리 소녀


진주 귀고리 소녀

저자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출판사
| 2010-04-1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17세기, 네덜란드는 말 그래도 '황금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가격비교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읽었던 책이다. 지금까지도 고이 책장 가운데 모시고 있는 인생의 책.


당시 나의 '첫 연애'라고 해야하나, 좋아하던 아이 덕분에 처음 읽었다. 나는 누군가가 듣는 음악이나 읽는 책, 좋아하는 영화 따위에 뿅 하고 감명받아 설레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이 바로 그 아이를 좋아하기 시작한 이유 중 하나였다. 읽으며 마음에 떠오르는 그 싸리싸리한 느낌이 정말 좋아서, 당장 책방에 달려가 빳빳한 새 책을 산 뒤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읽을 때마다 콩닥콩닥 하던 그 설렘이 아직까지도 기억이 난다.


음, 생각해보면 이 책과 함께 m-flo의 'let go'도 그 당시의 내 마음을 떨리게 했던 하나였다. 그 아이가 좋아하는 노래라고 알려주었는데 나도 듣자마자 빠져버려서, 세 달 남짓 사귀는 동안 둘 사이의 '테마곡' 처럼 돼버렸다. 당시에는 '버디버디'와 '2알' 짜리 문자를 보내며 연락을 하던 시기였으므로, 밤새 채팅 혹은 문자를 하며 이 노래를 몇번이고 돌려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도, 그리운 것도 아니지만 아직도 이 곡을 들으면 그 아이가 생각이 난다. 진주 귀고리 소녀와 let go. 사실 연관성은 하나도 없지만 이 시기 나의 감정상태는 이 책과 이 노래로 설명할 수 있다. 차분하게 가라앉았음에도 미세하게 떨리던 우심실과 좌심실.(!) 함박눈이 내린 다음 날 구리에서 집까지 걸어오면서 밟았던 깨끗한 눈. 그 눈도 기억이 난다.


이야기가 샜지만, 책의 내용을 짚어보자면 무엇보다도 서문에 작가의 말이 가장 인상깊었다. 기억하기로 작가는 '진주 귀고리 소녀'를 보자마자 홀린듯한 느낌에 사로잡혔고 당장 포스터를 사와 방에 붙였다고 한다. 이 그림은 그나마 몇 없는 베르메르의 다른 작품들과 매우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검은 배경에다가 소녀는 머리에 특이한 천을 두르고 있고, 그 표정도 뭐라 설명할 수 없을만큼 신비해서 그것이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작가는 베르메르가 그려낸 이 미지의 소녀는 누구였을까 상상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소설이다.


북구의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이 그림은 정말로 다른 베르메르의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베르메르는 많은 자식들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받고 초상화를 많이 그렸는데, 그 중 어떤 인물도 검은 배경 위에 그려지지 않았다. 우유 따르는 여자라든지 바느질 하고 있는 여자아이라든지, 연애편지를 읽고 있는 귀부인이라든지. 보통 무언가 일상적인 일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 소녀는 가만히 고개만 돌린채 나를 응시한다. 살짝 벌려진 입술에 뭐라고 딱잘라 설명할 수 없는 표정. 아마 작가도 저 표정에 매료됐을 거다. 물론 예쁘기도 하지만, 그렇게만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 신비로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언가.


게다가 이 책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그려지게 여겨지는 '진주 귀고리'는 이 그림의 화룡점정이다. 뭐 특별할 것 없고 오히려 소박한 머릿수건과 갈색 투박한 옷과 대비되게 반짝, 하고 빛나는 귀고리에 눈길이 먼저 간다. 단순하게 빛나는 귀고리는 매혹적인 소녀의 표정과 어우러져 미친듯한 신비감을 내뿜는다. 검은 배경은 그 매력을 두배로 만든다. 다른 어떤 것도 나와 소녀의 눈맞춤을 방해하지 않는다. 검은 배경 위에 떠오른 소녀의 눈빛과 빛나는 귀고리. 그 둘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세상에 나와 그 그림 둘만 남은 것 같은 느낌에 빠진다.


어렸던 나는 이 책을 읽고나서 한참 동안 이 책에서 작가가 상상한 내용이 정말 진짜일 거라고 확신했다. 베르메르의 다른 작품들까지도 모두 녹여내 그 사이의 빈 공간들을 채워넣은 상상력이 정말로 그럴듯해서, 아니 정말 진짜였으면 좋을만치 아름다워서. 사실이 아니라면 그냥 사실이라고 믿고 싶었다. 정말 이것이 사실이고, 작가는 신의 계시를 받아서 이 이야기를 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말도 안되는 상상까지 했을 정도니 말 다했다.


사실, 이 그림이 미술에 대한 호기심? 이랄까 배워보고 싶은 욕망을 자극한 도화선이 됐다. 트레이시 슈발리에가 이 책 이후로 쓴 소설이 전부 미술작품과 관련된 것이기도 했고, 그림, 예술작품이라는 것은 단순한 그림 한 장 아니라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숨어있는 것들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연관성을 찾아내고, 그 발견에 매혹되는 과정이 무척 매력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래서 내가 문학을 좋아하게 되었던 건가? 그렇게 따지면 시도, 음악도, 영화도 모두 마찬가지니까.


당연하게도 그 이후로 베르메르를 좋아하게 됐다. 저 소설이 아니었다면 절대 그럴리 없었을 거라고, 나아가 미술이라는 예술 장르 자체에 이만큼 관심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그런 은밀한 애정은 대학에 와서도 계속됐고,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내가 대학에 가서 쓴 첫 소논문의 주제가 됐다. 그 때 다른 소설들을 모두 다 읽었지만 '진주 귀고리 소녀' 만큼의 작품은 없었다. 나는 이 소논문으로 당당하게 A+ 받았고, 교수님이 내 사례를 후배 우글러들에게 언급하곤 한다는 얘기를 후배에게 들었다. 깨알 자랑. 역시 대상에 대한 애정은 공부의 가장 큰 원동력이 되는 듯하다.


물론 영화도 봤지만 생각보다 별로였다. 그리트의 그 감성을 담아낼 수 없어. 영화란 장르로는 정말로. 스칼렛 요한슨의 캐스팅도 정말 별로였다. 저 여자아이는 약간 동양-서양적인 느낌을 동시에 내는데, 스칼렛 요한슨은 너무 서양적이고 너무 뚜렷뚜렷한 이미지라 그리트와는 맞지 않는다. 비주얼적인 것만 놓고 보면 아예 안 닮은 건 아니지만, 느낌이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영화도 나쁘지는 않았지만 내가 상상해낸 그 그림과는 너무도 달랐다. 별로였어. 바보들. 나는 영화제작엔 관심이 콩알 만큼도 없지만 이 책을 영화화한다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을 것이란 별 말도 안되는 생각을 하며 영화를 욕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칭찬은 저 진주 귀고리 소녀를 닮았다는 말이다. 예전 그 아이도 나에게 이 그림을 닮았다는 말을 했었다. 요새도 그 말을 간간히 듣는데, 들을 때마다 무지 황송하지만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세상 현존하는 미인들 중 그 누구를 닮았다는 말보다, 저 소녀를 닮았다는 말이 가장 좋다. 이번에 유럽 여행을 다녀오며 네덜란드를 방문지로 꼭 넣었던 이유도 이 그림을 보기 위해서였다. 헤이그 왕립박물관에 가기 위해 헤이그까지 목적지에 넣었었는데.. 딱 내가 방문했을 때 공사로 문을 닫아서 못 보고 돌아와야 했다. 여행책에도 쓰여있지 않았었고, 큰 박물관이라 닫을것이란 생각도 못했었기 때문에 당시에 울뻔했다.


생각해보면, 운명일 거란 생각도 든다. 환상은 환상으로 남겨둘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므로. 실물을 보고 나면 그것이 끝일 테니까. 환상은 절대 사라질 수 없기 때문에 더 아름다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죽기 전에 꼭 다시 네덜란드를 방문해 이 그림을 볼테다. 보고 죽을 거다. 그 전엔 절대 죽을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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