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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디스 창고/문학

[이원희] 재즈문화사



재즈문화사

저자
이원희 지음
출판사
말글빛냄 | 2009-02-11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재즈는 삶을 온전히 품은 예술이다! 재즈의 삶을 통해 저자가 ...
가격비교



거의 1년 전에 산 책 같은데 이제서야 다 읽었다. 나는 클래식이라고 해야하나, 이 책에서 '유럽 현대음악'이라고 지칭하는 음악을 지루해서 잘 못 듣는 편이다. 사람들이 어떤 느낌으로 좋아하는 지는 알겠는데 뭐랄까 그냥 조금 지루하다. 그래 뭐 웅장하고 가끔 예쁘고 그렇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아직 내가 잘 몰라서 그런 거겠지.. 노다메에 나왔던 것들은 다 좋아한다. 뭐냐 나는?


그런 내가 유일하게 들을 수 있고, 즐기면서 좋아할 수 있는 연주곡은 재즈 연주곡인데! 뭐랄까 어딘가 예측 불가능하고 자유로운 느낌이 좋다. 나야 막귀라 이 책에 설명된 것처럼 연주 기법이나 장르까지 명확히 따져 듣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듣다보면 흥이 나고 듣는 게 재미있다.


이 책은 작년 언제쯤인가 알라딘에 갔다가 정가 25,000, 판매가 11,200원으로 구매한 것인데 전반적인 재즈의 역사와 굵직굵직한 사건들, 장르들을 시간순으로 설명해 놓았다. 가끔 재즈단상 이런거라든지 "즉흥연주는 민주주의의 '자유'를 닮았다.... 재즈는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를 닮아가려는 음악이라 할 수 있다" 뭐 이런 멘트는 레알 오글거리긴 했지마는, 일단 글이 잘 읽히고, 군더더기없이 깔끔하다.


'모호함'이라든가, '부정확함'이라든가 '불안함' 이라든가 하는 단어들이 나는 좋다.



p.54.

재즈의 근본적인 '부정확함'을 훼손하지는 않았다. 엄밀해지려는 욕망을 뚫고 나오는 강한 생명체가 블루노트인 것이다. 그 블루노트의 특성인 '모호함'이 재즈를 재즈 답게 했다. 여기서 역설의 긴장을 느낄 수 있다. 정확하게 블루노트를 적용하면 '제대로' 연주한 것이 아니고, 부정확하게 블루노트를 적용하면 '제대로' 연주한 것이다.


p.157.

반면 재즈는 연주가의 음악이다. 이는 루이 암스트롱이 설득력 있게 제시한 재즈의 미덕인 '즉흥성' 때문에 더욱 확고해졌다. 결국 작곡이나 편곡으로 장악할 수 없는 마지막 여백이 남는 셈이고, 이를 채워야 할 자는 연주가였다.


P.168.

즉 재즈에는 즉흥연주 부분이 있기 때문에 연주가 마무리되어야 작품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다. '약속된 연주'와 달리 '즉흥연주'는 작품을 완성하는 제 3의 창작이기 때문이다.


P.180.

최초의 재즈음반은 1917년, 오리지널 딕시랜드 재즈 밴드가 뉴옥의 빅터 사에서 공식적으로 녹음한 앨범인 <Dixieland Jazz Band One-Step>이었다. "이 음반은 카루소의 작품보다도 인기가 높아 백만 매를 돌파하는 히트를 쳤다. "당시에는 녹음기술 수준이 낮아서 음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세심하게 자리를 배치하고 끈기 있게 녹음 테스트를 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역사상 최초의 재즈음반이 탄생한 것이다. 이 음반이 큰 인기를 얻자, 음반 산업 관계자들은 흑인음악 시장에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20년대에는 흑인시장을 겨냥하여 '레이스 레코드'라 불리는 장르의 음반을 많이 출시했다.


p.220.

종종 프리재즈의 자유조성은 항간의 오해로 인해 유럽현대음악의 무조성과 동일한 개념으로 알려졌지만, 대부분의 악단은 무조성과 관계가 없었다. 단지 재즈를 전문적으로 들을 수 없는 청중들은 프리재즈를 무조성의 음악이라 인식했다. "이처럼 화성이란 관습의 문제다."


조성을 탈출하려는 1960년대의 역사적인 사건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앞서도 기술한 1960년대 오넷 콜맨이 발표한 <Free Jazz>의 프리재즈였으며, 다른 하나는 1959년 마일스 데이비스, 빌 에반스, 존 콜트레인 등이 함게 녹음한 <Kind of Blue>의 선법재즈였다.


p.230.

하지만 한 사조의 가능성이 고갈될 때까지 밀어붙이다 보면 종국에 그 음악은 '부정적인 전형성(클리셰)'을 띤다. 재즈인들은 그러한 진부함을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길을 모색했고, 그 과정에서 선택된 새로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새 사조를 열었다. 그들에게 그 아이디어는 역사를 여는 열쇠이자 족쇄였다.


p.298.

진보주의의 상징이었던 60년대의 독립자본 음반사들은 자본주의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록음악은 음반 산업에 포획되어 점점 상업화되었고, 재즈계도 70년대의 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그 시대에는 예전과 달리 대의보다는 예술의 생존을 위한 저항이 주를 이루었다. 자본주의에서 그 생존의 열쇠는 대중의 기호에 달렸으니, 프리재즈 음악가들 입장에서는 서글프고,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극단적인 즉흥 연주를 통해서 완벽히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이상은 음악외적인 체제의 통제를 받아야만 했다. 프리재즈가 급격히 몰락한 것은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음악은 여전히 전위적이었고, 이는 1960년대의 관대한 분위기 속에서 허용되었을 뿐이다.


반면 70-80년대 퓨전재즈는 재즈계의 대세로 자리 잡는다. 60년대 후반, 지미 헨드릭스의 록음악에 깊은 감흥을 받은 마일스 데이비스는 록 사운드를 재즈에 도입하는 실험을 했다. <Bitches Brew>라는 음반을 통해 마일스의 사이드맨들이었던 칙 코리아, 허비 행콕, 조 자비눌, 웨인 쇼터, 존 맥러플린 등이 퓨전재즈계의 전면에 등장했다.


p.310.

예술사는 대개 '새로움'과 '완숙함'을 선호한다. 물론 '새로움'이 '경박함'과 가까이 있고, '완숙함'이 '진부함'과 겹칠 때도 있지만, 역사는 그 경계선에서 균형을 잘 잡아 긍정적인 미덕을 갖춘 사람을 선택한다. 그리고 예술사가는, 선택된 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성과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새로움'이 '완숙함'이 되고 다시 그 '완숙함'을 깨고 '새로움'을 찾기를 반복하면서 예술가는 다채로워진다.

...

재즈비평가 소에지마 데루토는 "전위란 질주하는 뒷모습만 보일 뿐 얼굴을 보이지 않으며, 정체가 보이면 이미 전위라고 부를 수 없다"고 주장한다. 80년대 신고전주의의 기수인 데이비드 머레이는 "모든 재즈의 유산은 아방가르드의 유산"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연주로 표현한다.


p.317.

김현준이 아방가르드 재즈에 대해 언급한 내용은 의미 있다. 그에 따르면, 실험을 위한 실험은 맹목적이고 다소 무책임하기에 적절한 대안이 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 더 부정적이라 언급한다. 역사가 흘러가는 그 순간 자체가 사건이므로 역사의 시간 안에는 항상 사건이 있다. 사건이 없다면 역사를 이룰 수 없다.


p.334.

어쩌면 물음표는 모든 예술의 중요한 속성을 담은 부호일 것이다.


p.399.

비생산적인 '언쟁'은 자신의 논리를 버리지 않은 채 상대를 제압하려는 행위다. 그것은 상대에게 자신의 우위를 입증하고 상대를 계도하려는 데 목적을 둔다.


물론 생산적으로 '언쟁'을 하면 찬반양론을 가르더라도 건설적인 합의를 이루어낼 수 있지만, 그 또한 끝까지 균형감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완전히 대등하지 않은 이상 한쪽이 다른 한쪽을 흡수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닫힌 음악은 밀폐된 취조실에 타 음악을 초대해놓고 녹음익를 틀어놓은 후 대화를 하자는 모양새를 띤다. 상대는 주눅이 들어 자신의 논리를 제대로 펴지 못할 것이다. 취조실 안의 상대는 분명 그지만, 그가 아닌 꼴로 있게 된다. 초대한 사람은 결국 초대받은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반면 초대 받은 사람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창과 방문을 모두 열어두고 막걸리를 권한다면 어떨까? 바깥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막걸리를 마신다면, 상대는 일단 긴장을 풀 것이다. 그렇게 서서히 취한 상대는 속에 담은 말을 풀어낼 수도 있다. 서로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 농담을 섞으며 웃기도 할 것이다. 노래를 부르기도 할 것이다. 말이 흐트러져 대화가 엉키더라도 마음이 통한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오히려 엉킨 말 자체가 풍경의 소리가 될 것이요, 그들을 친구가 되게 해 줄 것이다. 둘 다 취해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자고 난 후에는 해장술까지 마실 수도 있겠다.


이처럼 '담소'의 매력은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데 있다. 그것은 누군가를 제압하고 계몽하려는 데 그 목적을 두지 않는다. 담소는 대화자가 스스로 즐기면서 상대를 성심껏 알려고 노력하는 과정이다. 열린 마음이 없다면 '담소'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