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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글

바티칸에서 온 편지

여행을 다녀와서 가장 뿌듯했던 것은 그거였다. 대학교 2학년 때부터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이유없이 항상 가고싶어했던 곳을 결국 취업 전에 다녀왔다는 거. 다녀오니 고 짧은 한 달 동안 집안에 참 많은 안좋은 일들이 있었고, 내 통장은 바닥이 나 있었으며 엄마 아빠의 심기불편함은 말로 다할 수 없이 심각해져 있었지만, 그래도 더이상 이 시기에 대해 후회는 하지 않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미래에 할 후회를 미리 걱정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을 쏟았던 것 같다. 이런 성격은 입시 준비 때 도움이 많이 됐다. 당장 눈 앞에 있는 TV와 컴퓨터의 작은 유혹을 그 생각만으로 이겨냈다. 인간관계에도 한없이 회의적이었던 까닭에 친구들과의 관계도 쉽게 떨쳐버릴 수 있었다. 친구는 친구일 뿐이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오로지 '나'에만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지독하게 독했다.


누가 보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 아빠 말대로 누가 보면 그냥 여행일 뿐인데, 취업 준비로 발을 동동 굴러야 할 이 시기에, 온갖 중요한 일들이 터져나오고 있는 이 시기에 꼭 여행을 갔어야 했느냐고 물으면 나로서는 그냥 어깨를 한번 으쓱 하는 것 밖에는 답할 게 없다. 어떻게 보면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이 약한 엄마 덕이다. 작년 겨울에 다녀온 친구를 두고 부러운 듯 얘기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엄마는 '아빠한테 잘 말해 보겠다'고 했고 반半허락을 얻어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동정심을 자극해 나는 내가 원하는 걸 했다. 가족들이 한국에서 온갖 슬픈 일들을 해결하고 있을 때 나는 타지의 땅을 걸었고 즐거워했고 사람들을 만났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나는 늘 이렇게 지독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렇게 지독한 게 뭐 그렇게 잘못인가 싶을 때도 있다. 그냥 아직 너무 어린 거라고 생각한다. 뭐 자라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없었더라도 슬픈 일들은 계속 슬펐을 거고, 내가 한 달 여기에서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만료된 토익이나 다시 칠 준비를 했다 하더라도 그게 내 인생에 큰 영향을 과연 미쳤을까. 사람은 항상 선택의 기로에 놓이고, '현 상태 유지'라는 선택지는 항상 안정되나 뻔한 결과를 가져온다. 부모님은 내게 조금 더 안심을 했겠지만 나는 그저 도서관이나 다니며 몇 권의 책을 읽었겠고, 격일로 하는 스터디를 몇 번 더 했겠고, 블로그에 몇 개의 쓸데없는 글이나 더 올렸겠다. 물론 돈은 남았겠고 심지어 돈을 더 벌었겠지만, 전혀 궁금하지 않은 삶이다.


궁금한 선택은 항상 새롭다. 내가 어디로 어떻게 튕겨나갈지 모르는 선택지는 항상 흥미롭다. 마치 도박처럼, 위험도 따르지만 그만큼 기대감도 커진다. 늘 상위권에 머무는 삼성야구를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그거다. 걱정하거나 속상할 일이 없는 대신, 그만큼 반짝거리는 긴장감도 없다. 야구 못한다고 욕할 일도 없지만, 7등으로 올랐다고 환호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나 인생은 공평한 걸까? 삶이란 책을 겨우 펴봤을 뿐인 나는 알 도리가 없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궁금한 선택을 한 나는, 아직 많이 두렵다. 기분도 업앤다운이 심하다. 약간 후회할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돌아간다 해도 다른 선택을 할 것 같지는 않기도 하고 그렇다. 앞을 모르는 상황에서 내린 결정이 으레 그렇듯, 다음 발을 내딛을 길이 어떤 길인지 모른 채 그저 더듬어 확인하는 방법밖엔 없으니 두렵다. 쫄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아직 다음 챕터를 읽지 않은 나로서는 심장이 쫄릴 수밖에 없다. 심지어 이 책에는 목차도 없다.


그래도, 여행을 다녀와 가장 크게 느낀 교훈을 적용해보면 마음이 좀 편해진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거다. 여행을 다녀와서 가장 많이 느낀 게 그거다. 시작 전에는 두렵지만 막상 가 보면 다 어떻게든 해결이 되더라. 문제가 심각한 것 같지만 가까이 가보면 그래도 결국 어떻게든 해결이 된다. 가끔은 사람들이 도와주고, 가끔은 걱정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지기도 하고, 가끔은 나 스스로 나를 돕기도 한다.


22살 전의 나는 같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걸 좋아했다. 드라마나 영화나 책이나, 하나에 꽂히면 그냥 그거만 8번이고 10번이고 반복해서 보는 게 습관이었다. 내용은 물론이고 대사와 순서까지 모조리 외울 정도로 반복했다. 22살 이후의 나는 새로운 것들에 탐닉했다. 내가 지금껏 보지 못한 것들이 보고 싶었고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알고 싶었다. 이제 다시 결정해야 한다. 새로운 챕터를 읽을 것인지, 아니면 읽은 챕터를 다시 읽을 것인지. 어제 저녁 바티칸에서 내가 나에게 보낸 엽서가 도착했다. 나는 나에게 이렇게 썼었다. "언제 어디서나 스스로를 믿고 감정에 솔직하며, 다른 사람들이나 사회의 잣대가 아닌 내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하길. 늘 나 자신을 가장 사랑하자." 그리고 마지막에 덧붙였다. "사랑해 나야♡"


오글거린다.. 대체 왜 이랬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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