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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디스 창고/문학

[김영하] 너의 목소리가 들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저자
김영하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2-02-28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김영하식 슬픔의 미학, 고아 트릴로지 [너의 목소리가 들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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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6

내가 선택적 함구증이라는 일종의 불안장애를 겪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훗날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내 고통에 이름이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구원을 받은 느낌이었다. 나 말고도 그런 병을 앓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이니까.


p.73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보다 더 나쁜 게 있어요."

"그게 뭐냐?"

"고통을 외면하는 거예요. 고통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지 않는 거예요. 세상의 모든 죄악은 거기서 시작돼요."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거야."

"피할 수는 없지만 노력은 할 수 있죠. 인간이든 동물이든 자기 이익을 위해 불필요한 고통을 줘서는 안 돼요."

"세상일이 네 말대로 간단하다면 좋겠지."

"뭐가 복잡한가요?"

"그렇다면 고통의 경중은 누가 가리지? 네가 가리나? 우리에 갇혀 있는 개들만 고통받는 줄 알아? 개장수들도 먹고사느라 힘들다고. 그 사람들에게도 가족이 있어. 네가 타이어를 펑크냈기 때문에 그 집의 아이들이 하루를 굶어야 할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요?"

"너는 우선 어른이 돼야 한다. 그럼 자연히 알게 돼. 세상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지금 판단하지 못한다면 어른이 돼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저는 제 판단으로 행동한 거고, 그러니까 아무 후회가 없어요."

"너는 세상에 원한을 품고 있어. 그래서 네 알량한 정의의 이름으로 그걸 심판하고 싶은 거야. 그건 위험해."


제이는 마치 전자제품 사용에 대한 안내를 들은 소비자처럼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위험하죠. 저도 알고 있어요."


p.134

점심시간을 마치는 종소리가 울렸다. 제이는 멀어지는 항구를 돌아보는 선원의 눈길로 학교 중앙의 시계탑을 올려다보았다. 교실을 향해 달리는 내 목덜미에 제이가 던진 말이 와서 감겼다.


"뛰지 마. 네가 이 우주의 중심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참을 수 없는 반발심이 들었지만 당장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찜찜한 무언가가 오랫동안 마음 한 구석에 들러붙어 있었다.


p.139

"너 그 광고 모르는구나. '당신은 소중하니까요.'"

"몰라."


목란이 손을 뻗어 제이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이 따뜻했다.


"내 오토바이는 어때? 얘는 나한테 어울려?"


목란이 물었다.


"네 느낌은 어때?"

"좋아. 편해. 잘 맞아."

"네 오토바이도 너를 좋아하고 있어."


제이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목란에게 말했다.


p.161

인기가 권력이라는 것, 권력은 폭력이 본래 구현하려던 것을 폭력 없이 구현하는 힘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p.237

스웨덴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평생 그리 많은 시를 짓지는 않았다. 약 이백 편 정도 되는 그의 시 중에서 나는 <미완의 천국>이라는 시를 좋아한다. 그 노래는 이렇게 끝이 난다.


우리들 각자는 만인을 위한 방으로 통하는 반쯤 열린 문.

발밑엔 무한의 벌판.

나무들 사이로 물이 번쩍인다.

호수는 땅속으로 통하는 창.


침엽수림에 둘러싸인 호수가 많은 북유럽 특유의 풍경을 바탕화면처럼 깔고 그 위에 인간에 대한 통찰을 살며시 얹어놓은 느낌이다. "우리들 각자는 만인을 위한 방으로 통하는 반쯤 열린 문"이라. 그 문이 반쯤 열려 있다는 것이 묘하다. 닫혀 있지도 않고 활짝 열려 있지도 않다. 슬쩍 지나쳐도 그만이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가면 거기에는 다른 세계가 있다.


p.246.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만다."


p.273

제이의 입에서 태연하게 흘러나오는 사연들에 놀라 그녀의 몸이 굳었다.


"뉴스에서 볼 때는 설마 그런 일들이 있을까 싶었는데."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것들은 결국 모두 현실이 된대요."


제이가 담담하게 말했다. 


"누가 그래?"

"TV에 나온 어느 과학자가 그랬어요."

"그런 일들이 있을 수 있다고는 생각했어. 그렇지만 그런 일을 직접 겪은 애를 보게 될 줄은 몰랐어."

"몸속에 있어도 모른다면서요? 암 말이에요. 우리 같은 애들도 사람들은 전혀 못 봐요. 투명인간처럼 쓱, 지나가버리는 거죠. 좀 거북하고 불편하고 뭐 그럴 뿐이겠죠. 정 심하면 도려내면 되고."


p.275.

당신은 제이가 살아 있으며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 믿습니까?


대답은 오지 않았다.



-

해와 달.

동규와 제이.


내 안에는 아직 제이가 살아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