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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글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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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를 만났다. 군대 가기 전 구리에서 내가 잠깐 술자리에 들른 것 이후로 3년 만이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같이 과외를 했으니 알고지낸 지도 10년이 넘었다. 같은 중-고등학교를 나왔고, 고등학교에 올라가고 나서도 같은 과외에 다녔다. 나의 학창시절을 쭉 지켜본 거의 유일한 친구인 셈이다. 학년은 하나 아래지만 빠른이라 나이는 같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꼬박꼬박 누나라고 불러준다. 


나는 특별하다면 특별한 과외를 다녔다. 지금은 학교 선배님이 된 남쌤은 가정집의 한 방 통째를 과외방으로 만들었다. 선생님은 수학만 가르치셨지만 시험기간이 되면 다른 과목도 봐주셨다. 그래서 모든 아이들이 온과목 문제집을 가져와 마치 독서실처럼 과외방을 드나들었다. 시험기간에 학교가 끝나면 무조건 과외방으로 갔다. 주말에도 갔다. 점심 저녁은 각자 시켜먹거나 집에 가서 먹고 왔다. 학년도 다양했다. 나는 그곳에서 중학교 3년 내내 공부를 했다.


학교보다 남쌤네 있는 시간이 더 좋았다. 나만 그렇게 느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공부하기 싫다고 선생님한테 칭얼거리고 짜증부리면서도 시험기간이 되면 모두가 늘 과외방으로 모였으니까. 모두 각자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진우는 조용한 성격에 맨날 졸아서 혼이 났고 (그 때 많이 자서 키가 그렇게 컸는지도 모른다) 나는 수학 공부를 하라고만 하면 입을 툴툴거리고 졸아대서 혼이 났다. 


참다 못한 쌤이 "야 강뿅뿅 너 그만 졸고 일어나서 국어 해!" 하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쌤은 "너는 국어만 하면 잠이 깨는 모양이다"며 신기해했다. 그 외에도 다혈질에 잘 예민해지던 강훈이, 신화를 좋아하던 혜인이, 칼뱅파 루터파 나눠서 같이 시시덕댔던 진희언니, 등등등. 


중학교 2학년 때 암흑기를 보냈지만 그걸 버틸 수 있었던 버팀목은 가족보다도 그 과외방이었던 것 같다. 그 곳에서 아직 나는 그렇게 어둡지 않았다. 뭐랄까, 학교에서처럼 나를 판단하려 하는 사람도 없었고 내가 미친 짓을 해도 받아들여졌다. 특히나 바로 옆단지였던 나는 그곳에서 숱하게 밤을 샜다. 그 곳에서 교복을 갈아입고 바로 시험보러 학교로 간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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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나에 대한 얘기를 듣는 것은 즐겁다. 나는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 작은 습관들에서부터 또라이같은 행동까지 새록새록 생각이 난다. 그 때 난 스카이 슬라이드 폰을 썼고, 그 땐 카메라가 내장형이 아니어서 옆에 카메라를 꼽아 써야 했다. 옮길 방법이 없어서인지 그 때 사진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데 그게 좀 아쉽다.


또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엠피쓰리가 한참 유행했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 돼서야 첫 엠피를 샀다. 그래서 그전까지는 늘 씨디 플레이어를 들고 다니며 노래를 들었다. 남쌤은 수학 문제 풀 때랑 교과서 정리할 때만 노래 듣는 것을 허락해 줬는데, 듣던 노래가 질릴 때면 진희 언니나 진우, 홍씨 엠피를 많이 빌려다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어느 날은 이런 일이 있었단다. (역시 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진우가 지나가다가 내 가방을 밟았는데 뭔가 뿌각 하는 느낌이 났다. 그래서 열어보니 내 씨디피가 부서져 있었던 거! 나는 물어내라고 난리난리 쳤고 진우는 당황해서 "헐 누나 미안해..." 했는데, 나중에 씩 웃으면서 "그거 원래 망가져 있던 거야" 라고 했다고 한다. 나 너무 깜찍했다.


"누나는 중학교 때보다 지금이 더 귀여운 것 같아. 고등학교 때 성격 되게 어두웠었는데 대학와서 좀 바뀌더니 지금은 다시 중학교 때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아." 오늘 진우가 말했다. 고등학생 때 굉장히 어두웠던 나한테 "누나에게서는 검은 오로라가 나와"라고 했던 장본인인 진우가 그렇게 말해주니 뭐랄까 감회가 더 새로웠다. 나도 그렇게 느낀다. 지금의 나는 온전한 나인 느낌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 5년이란 세월이 걸렸지.. 


그 때 과외에서도 지금처럼 또라이 같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처음 보는 애들한테 리얼 이유 없이 뻐큐 날려서 미친 사람 취급 받기도 하고, 노래부르고 소파에서 풀썩풀썩대고 이상한 짓도 참 많이 했다. 그런데도 그 시기가 가장 재밌었고 좋았던 걸 보면 그런 미친 또라이 성격 파탄자 개그개그한 성격이 나의 진짜 모습-진짜 성격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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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 기억에 남선생님이 나를 부를 때는 늘 "뿅뿅아" 가 아니라 "야! 뿅뿅뿅!" 이었단다. 항상 불릴 때가 공부 안하고 딴짓 하거나 졸고 있을 때여서. 기억이란 신기하다. 나는 기억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진우가 해주는 얘기를 듣자마자 선생님의 목소리가 떠올라 웃음이 났다.


오랜만에 만나는 거라 약간 데면데면 하려나 걱정했는데 얼굴 보자마자 반가워서 웃음부터 나왔다. 서로 공유하는 과거가 있다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다. 약간의 근황토크와 여행 이야기를 지나 중고등학교 때 얘기 살짝 했을 뿐인데도 시간이 금방 갔다.


세상엔 참 이런저런 우연이 많다. 올해 초에 새해인사를 돌리다가 진우 이름을 발견했고, 지금쯤이면 제대 했겠구나 싶어 문자를 보냈다. 알고보니까 나한테 문자 받기 바로 전 날에 마제스타워 아래 빵집에서 벽에 걸린 커다란 진주귀고리 소녀 그림을 보고 친구들에게 "아 나 저 그림이랑 닮은 누나 아는데"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 갑자기 생각이 났었는데, 바로 문자를 받아서 신기했다고. 그리고 말했다. "누나가 그때 자기 저 그림 닮았다고 엄청 얘기하고 다녔잖아." 대체 내가 얼마나 우겨댔길래 그걸 10년 넘게 지난 오늘까지 기억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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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성격은 잘 안 변한다. 차분차분한 예전 그대로였다. 기분이 좋았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물론 나쁜 사람들도 많지만, 세상엔 좋은 사람들도 정말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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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훈이가 미국에서 돌아오면 셋이 같이 남쌤 찾아가기로 했다. 새해에 남쌤한테도 문자 드렸었는데 한번 놀러오라고 했다. 그 때 초딩이었던 선생님 큰아들이 이제 대학을 갔고, 역시나 초딩이던 진우네 막내도 올해 스무살이 됐단다. 세월 한번 참 빠르네.. 셋이 모여서 옛날 얘기 하면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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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외집이 몇층이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진우랑 천원빵 내기를 했는데 둘다 틀렸다. 나는 왠지 9층 아님 10층일 것 같다 했고 진우는 4층 아님 7층이었던 것 같다 했는데 둘다 틀렸음. 6층이었다. 같은 동 사는 송강훈한테 물어보니 "6층이야. 둘 다 바보들 아님?"이라고 답이 왔다. ㅇㅇ 그런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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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뭐랄까, 항상 중학교 때를 좀 (많이) 안 좋게 기억하고 있었다. 어두웠던 기억이 더 커서. 그런데 오늘 얘기 나누다보니, 그 때도 이렇게 살만한 일들은 있었구나 싶었다. 


역시, 상처를 주는 것도 사람이고 그 상처를 치유받는 곳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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