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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디스 창고/영화

[샘 멘데스] 아메리칸 뷰티


아메리칸 뷰티 (2000)

American Beauty 
9
감독
샘 멘데스
출연
케빈 스페이시, 아네트 베닝, 도라 버치, 웨스 벤틀리, 미나 수바리
정보
드라마 | 미국 | 122 분 | 2000-02-26



그런 말 들어봤어?

겉부터 썩는 것보다는 속으로 썩어가는 게 더 무섭다고들 하잖아.


나 어렸을 때는 명절이나 제사 때 먹게되는 연두색 파란 대추를 참 좋아했는데

어떤 사건 이후로 대추를 입에도 못 댔어.

나는 그날도 제사를 막 끝내고 정리를 마치자마자 대추 먼저 찾았지.

아아 그 고운 자태. 그 매끈함.

얼른 먹고 싶어 침을 꼴깍 삼켰어.


먹지 말고 일이나 먼저 도우라는 엄마의 잔소리가 들릴까

나는 바로 고 반질반질한 대추를 콱 하고 깨물었지.

그런데 말이야 안에서 하얀 애벌레가 꿈틀대는거야!

배때지가 뚱뚱한 하얀 벌레가!


나는 기겁을 하고 전부 뱉어버렸고

그 이후로 3년간 대추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어.

겉모습이 그렇게 탐스러워 보이지만 않았더라도 그 충격이 그렇게 크진 않았을거야.



비슷한 사례는 또 있어.


고등학교 때, 겉으로 잘 맞지 않던 친구가 있었어.

나도 그 아이를 싫어했고, 그 아이도 나를 좋아하지 않았지.

대학 와서 서로에 대해 오해하던 것들을 풀고 더욱 친해졌고 지금까지도 잘 만나고 있어.

반면에 대학때까지 누구보다 친한 것처럼 지내던 친구는, 어떤 계기로 하루만에 절교를 했다.



썩은 사과를 상상해봐.

겉이 썩으면 누구나 썩었다는 사실을 알고 도려내야겠다 마음을 먹기도 쉽고

도려내기도 쉽지.


하지만 속부터 썩어가고 있는 사과라면?

그 누구도 속이 썩고 있다는 상상을 못한다면?

백설공주의 독이 든 사과처럼,

너무도 눈부시게 반짝거려 어느 누구도 칼을 댈 생각을 할 수 없는, 그런 화려한 사과라면?



나란히 위치한 미국 부촌의 세 집을 보여주는 이 영화도 그런 썩은 사과를 보여주지.

윤택해진 삶, 나아진 교육환경, 화려한 TV, 멋진 차, 비싼 가구들..


뭐든 얘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

자유롭게 섹스를 논하고
동성애자는 자유롭게 스스로의 파트너를 소개하고

노력만 한다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끝없이 들려오는 확성기 소리.



하지만 좀 더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 있어.

번쩍이는 멋진 집 속의 사람들 모두, 어딘가 썩어가고 있다는 것을.

바로 눈 앞에 있는 진짜는 무시한채 TV 속의, 누군가가 주입한 관념 속 가짜 모습만 좇고 있는 사람들.


가난이 무능으로 이어지고 값싼 게 쿨하다고 여겨지는 사회.

직장과 가족은 파편화되어 더이상 기댈 수 없는 공간이 되었고

친구는 나를 돋보이게 할 하나의 장신구로, '몸'은 내가 여전히 건재함을 증명할 하나의 도구로써 사용돼.



사랑과, 우정과, 진심, 행복, 슬픔같은 말들은 촌스럽게 여겨지곤 해.

살아있다는 것은 실패하지 않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서라는데,



그 성공은 대체 어디에 있나요?



가장 자유로운 시대처럼 보이지만 누구에게도 솔직할 수 없는 사람들.

다양성을 가장 존중하는 사회처럼 보이지만 누구에게도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

힘싸움을 하고, 젊은 것, 아름다운 것을 찬미한다.

느리고 못생긴 것, 무용無用한 것들은 폐기되는 시대.



진짜 아름다움은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해.


들판 위에 핀 하얗고 노란 들꽃들

바보같은 행동을 하고 깔깔댈 때

못나고 멍청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조차 사랑스럽게 여겨주는 사람들.

소파 위에 마구 흘리며 빵을 먹을 때


바람과 나와 봉지가 함께 춤을 추는 그런 순간

나는 그런 데에서 행복이 나온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런 행복을 찾기엔 사람들이 벌써 너무 많이 잊은게 아닌가 싶기도 해.

예전의 자신들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흙투성이에 아름답지도 않았지만 얼마나 많이 웃으며 지냈었는지를.



이 영화는 나온지 16년이나 지난, 미국 영화지만
그렇게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무언가에 와와하고

또 다른 무언가에 예예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주변을 꽉 채우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그럼 답장 기다릴게.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