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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디스 창고/영화

[피트 닥터] 인사이드 아웃



인사이드 아웃 (2015)

Inside Out 
8.8
감독
피트 닥터
출연
다이안 레인, 에이미 포엘러, 카일 맥라클란, 민디 캘링, 빌 하더
정보
애니메이션 | 미국 | 102 분 | 2015-07-09


내가 그토록 검은 안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포기하는 것을 멈췄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내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던 어린 날에는, 감정이란게 참 귀찮았다. 

기쁘고 행복한 건 좋은 일이지만, 기쁨이 있기에 슬픔이 있다.

기뻐본 적이 없으면 슬픈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너무 지독하게도 혼자였고 끈질기게도 우울했던 그 시기를 보내며 나는

다시 그런 감정은 겪고싶지 않다고 다짐했고

그래서 모든 일에 철저하게 감정을 배제하려고 애썼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혼자서.

해야하는 일은 하고 할 필요가 없는 일들은 최대한 하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만화책 읽는 것도 만화 보는 것도

노래하는 것도 되도않는 막춤추는 것까지 좋아하던 나였는데

그땐 그 모든 게 쓸모없게 느껴졌었다.


그리고 이 모든 안개에서 조금씩 벗어난 것은 내가 포기하는 것을 멈춘 이후부터였다.

사람을 믿고, 누군가를 좋아하고, 내 마음을 털어놓고.

지금은 행복하지만 곧 나락으로 떨어질 거라는 불안함이 늘 나를 막았는데,


그 두려움을 꾹꾹 눌러담고 한걸음씩 안개를 헤치고 나가니

나는 그렇게 거부받는 존재가 아니구나, 슬픔보다 기쁜 감정이 더 많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해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여러가지 감정들이 있었다.


기쁘고 행복한 건 물론이고, 당혹스러움, 설렘, 떨림, 즐거움

간혹 슬프고 외롭고 힘든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다른 지지대가 나타났다.

새로운 일, 새로운 환경, 공부, 새로운 사람들, 내 옆에 있어주는 친구들, 내 동생, 가족


그렇게 하나 둘씩 무너져 흑백으로 가득찼던 내 세상을 다시 세워나갔고,

이제는 조금씩 반짝이기 시작하는 것도 같다.


무너졌던 가족 마을도

폐허였던 우정 마을도

아예 흔적조차 없었던 취향마을도

사막으로 말라가던 상상의 마을도.



포스터에는 아이들을 이해하기 위한 영화라는 설명이 붙었지만,

내 눈에 이 영화는, 어린시절을 보낸 모든 어른들에게 보내는 치유의 메시지에 가깝다.


누구든, 크고 작건 어떤 종류의 슬픔과 상실감, 세상과의 단절을 느끼며 자란다.

자기가 가장 믿었던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 온다.

내가 만들어 놓은 세계가 부서져 내리는 순간도 온다.


이 영화는 잊고 지냈던 그 시기 상처를 꺼내어 도닥이고,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여준다.

그 아픔들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 이렇게 힘들었지,

많이 아팠겠구나.

하지만 네 세상은 너의 행복을 위해 이렇게 애쓰고 있어.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시절 내가 느꼈던 행복과 기쁨의 순도가 100% 였다면

지금 내가 느끼는 건 확실히 그보다 훨씬 덜 순수한 종류의 행복이다.


현실적인 고민들에 마냥 웃기만 할 수도

아무 걱정없이 늘 놀기만 할 수도

평생 하고 싶은 일들만 하고 살 수도 없다.


그치만 그건 딱히 나쁜 게 아니라고.

기쁨과 슬픔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진짜 행복은 행복하기만 해서는 얻어질 수 없다고.

슬픔을 알아야 진짜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가장 반가운 것은 엉뚱 마을의 재건이다!!!

4년 전쯤까지만 해도 내 취향이랄까 엉뚱함은 소멸상태였는데,

이제 점점 내가 좋아하는 걸 공격적으로 찾아가고,

내가 뭘 할 때 가장 행복한지 알아간다.


이젠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뭘 좋아하는지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고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걸 싫어하는 사람인지 말할 수 있다.

슬플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언제 가장 기쁜지, 뭘 해야 피로한 내 심신이 안정을 되찾는지.

그렇게 매일 매일, 나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간다.


지금은 행복하지만 불과 2시간 뒤면 엄청 슬픈 일, 우울한 일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걸

그러다가도 또 기쁜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그 때 무너지지 않고 버텨주었던 내게 참 고맙고

그 때 내가 스스로 치유해내는 걸 도와주었던 모든 사람과 환경들이 고맙고

다시금 그 때의 상처가 잘 아물었는지 살짝 들춰내 호호 불어준 영화속 캐릭터들이 고맙다.


이걸 만들어낸 픽사/디즈니도 고맙고.




+)
다채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엄청나게 많은 마을을 품고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


+)

영화를 보며 떠올린 슬픔의 힘.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 시 떠올라서 찾아봤다.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