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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디스 창고/문학

[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



뉴스의 시대-뉴스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저자
알랭 드 보통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4-07-3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일상의 철학자, 알랭 드 보통뉴스에 탐닉하는 시대, 미디어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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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함은 새로운 도전이자 해결해야 할 과제다. 인류 역사상 사람들을 지루하게 하는 뉴스란 거의 없었다. 존재하는 정보는 소수의 비밀스러운 귀족 통치 계급 수중에 있었다. 뉴스는 극소수의 사람들, 즉 왕, 수상, 군대 지휘관과 무역회사 고위 임원 같은 이들에게만 전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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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문제는 우리가 더 많은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접한 그 사실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는 데 있다. 매일같은 새로운 뉴스가 쇄도한다. .. 하지만 이런 것들이 진정 '의미하는'바가 뭐란 말인가? 이 사실들은 정치적 삶의 핵심적 질문들과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 이 뉴스들은 우리가 뭘 이해하도록 돕는 걸까?


사실의 정반대에 있는 것은 '편향'이다. 진지한 저널리즘의 영역에서 편향은 무척 악명이 높다. 그것은 악의적인 의제, 거짓말, 대중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권을 부정하는 권위주의적 시도와 동의어다.


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편향에 좀더 관대해져야 할지도 모른다. 순수한 의미에서 편향은 사건을 평가하는 방법을 뜻할 뿐이다. 그리고 이는 인간의 기능과 활동에 관해 일관되면서도 근본적인 논지에 의해 인도된다. 편향은 현실 위를 미끄러져들어감으로써 더 명확하게 사건을 들여다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한 쌍의 렌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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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한 기삿거리라는 게 원체 좀 지루하고, 대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은 너무 안이하다. 한편에는 사려 깊지만 무기력한 가르침을 제공하는 매체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책임감 따위 휙 벗어버린 선정주의를 공급하는 매체가 있다는 식의 현재의 이분법을 초월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도전이다.


미래의 이상적인 언론기관에서는 사건들을 맥락화하고 대중화하는 야심찬 과업이 아주 진지하게 이루어져서, 복지수당에 대한 기사가 근친상간을 하고 인육을 먹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주민들에 대한 기사만큼이나 (거의 대등할 정도로) 흥미진진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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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나라의 어느 시점이든 그 땅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엄청난 양의 모순된 정보가 존재한다. 소아성애 살인마가 여럿 활동하고 있겠지만, 반면 학대와 구타로 어린이를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에 반대하는 수천만의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불륜을 저지른 배우자가 고기 자르는 칼로 살해하는 충동에 이끌릴 수 있겠지만 사람들 대다수는 눈물과 분노에 차 되는 대로 살아가는 길을 택할 것이다 ... 몇몇 사람들은 언제나 번쩍거리는 파티에 가겠지만, 훨씬 더 많은 이들은 평범한 삶이 주는 우아함과 기쁨, 존엄과 자유를 받아들일 것이다.


참 이상한 일이긴 한데, 동전의 훨씬 유쾌한 쪽은 결코 뉴스가 되지 않는다. 사실이어도 매체에는 싣지 못할 기사들이 넘쳐난다.


"87세 할머니가 일면식도 없는 15세 행인의 도움으로 철도역 층계를 세 계단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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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국가가 그저 절단된 손, 불구가 된 할머니, 지하실에 죽어 있는 소녀 셋, 당혹스러워하는 수상, 수조 파운드에 달하는 부채, 기차역에서의 동반자살, 그리고 해안 지대에서 벌어진 치명적인 오중 추돌 사고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의 국가는 바로 이 순간 지켜보는 이 하나 없는 가운데 교회 첨탑 위를 흘러가고 있는 구름이기도 하다. 소매를 걷어붙인 환자의 팔에 주사를 놓는 동안 의사의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온화한 마음이기도, 산울타리 옆 들쥐이기도, 어머니가 자애로이 지켜보는 동안 갓 삶은 달걀의 표면을 톡톡 두드리는 꼬마이기도, 능숙하면서도 용감하게 영해를 수찰중인 핵잠수함이기도, 새로운 엔진의 첫 시제품을 제작중인 공장이기도, 엄청난 도발과 몰인정한 언사에도 불구하고 인내와 용서의 새로운 비축분을 발견해내는 배우자이기도 하다.


이 또한 현실이다. 뉴스가 제공하는 국가에 대한 소식들이 국가 그 자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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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 뉴스의 임무가 있다. 사회가 저지른 최악의 실패를 우리에게 날마다 상기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이따금) 자부심과 회복력과 희망을 갖출 수 있는 능력을 교육하고 지도하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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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도 달콤한 말을 건넬 수 있다. 늘 그러듯 대참사와 사악한 사건에 보도의 초점을 맞추면서도, 뉴스는 국가가 어려움을 헤치고 나아가며 진로를 정하는 데 필요한 작은 희망을 증류하고 응축하는 핵심적인 기능을 이따금 수행해야 한다. 뉴스는 사회의 악행을 폭로하고 그 고통을 직시함으로써 사회를 돕는 한편, 선함과 용서와 분별력을 충분히 갖춘, 구성원들이 기여하기를 원하는 가상의 공동체를 구축하는 중요한 임무 또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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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 사실이 언론의 억측과 절망스러운 보도의 절반 정도는 단박에 날려버릴 것이기 때문에 거의 모든 언론이 감히 인정하려 하지 않지만) 정치의 핵심 영역에서 '한 사람이나 한 정당이 단숨에 성취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다. 뉴스 순환 속도가 요구하는 것만큼 빨리 상황을 변화시켜내는 건 누구라도(그 사람들은 그저 바보 내지 멍청이 집단이 아니다)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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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리즘이 어떻게 밝혀내야할지 잘 알고 있는 워터게이트 유형의 악당들만 계속 찾아다닌다면, 우리는 산적해 있는 중요하고 커다란 문제들을 놓칠 공산이 크다. 보다 구조적이고 비인격적이면서, 악당들의 위법행위 못지않게 유해한 수많은 잘못들을 철저히 조사하는 데도 실패할 것이다. 이를테면 가정폭력을 불러일으키는 수동적 공격성 같은, 인생을 파괴하고 사람을 의기소침하게 만들지만 결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서 법망을 빠져나가는 행위와 가치관에 기인한 잘못들 말이다.


현체계에서 뉴스는, 어떠한 위법행위도 금품 갈취도 없이 수천 명의 사람들을 굴욕적인 환경에서 살게 만드는 부동산 개발업자를 '보지 못한다'. 사기 행위를 악착같이 취재하는 열성적인 기자도 공공 생활의 존엄과 지성을 서서히 갉아먹는 광고 방송으로 형사상 책임을 져야 할 사람에게는 손끝 하나 댈 수 없을 것이다...


제대로 생각하면, 탐사 저널리즘은 집단과 개인을 파괴하는 모든 요인들에 대한 전방위적인 관심에서 시작해야 한다. 뉴스는 무엇보다 정신 건강, 건축, 여가, 가족 구조, 연애, 회사 경영 방식, 교과과정과 신분질서 등을 취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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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투리 잡기식 저널리즘 뒤에는 전러리스트들의 무력한 분노가 자리하고 있다. 그들은 자기네 나라의 많은 것이 대단히 잘못돼 있다는 걸 알지만, 권력에 접근할 방법을 갖고 있지 않거나 혹은 관료제에 대한 인내심이 부족하다. 이 문제들을 해결할 때 진정으로 잘못된 점들에 명확하게 다가갈 수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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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을 폭로하고 공개하는 일의 유일하게 정당한 명분은 그 잘못이 더는 확산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부패, 바보짓, 복지부동에 맞닥뜨렸을 때, 뉴스는 잘못된 점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현재의 수준에 머무르는 대신 미래의 더 큰 역량을 기르기 위해 항상 애써야 한다. 권력자를 쓰러뜨리는 게 얼마나 만족스럽고 중요한 일인지와 무관하게, 저널리즘의 탐사는 미묘하게 다르지만 언제나 겹치지는 않는 두 가지 목적, 즉 세상사를 조사하고 개선하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시작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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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의 가장 고귀한 약속은 무지를 줄이고 편견을 극복하게 하여 개인과 국가의 지성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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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는 신문을 증오했다. 신문이 독자로 하여금 정직한 사람이라면 결코 타인에게 떠넘기는 데 동의하면 안 되는 어떤 임무를 그렇게 떠넘기도록 부추긴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 임무란 바로 생각하기이다. 언론은 이제 중요한 문제에 대한 복잡하면서도 지적인 논평을 생산해내는 일을 자기네 직원들에게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고, 독자들의 정신은 각자의 특별한 여정, 탐구, 성찰을 멈추고 그 일들을 <르 피가로>의 논설위원과 그 동류의 인간들이 솜씨 좋게 포장한 결론에 통째로 떠넘길 수 있따고 은근히 암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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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베르의 <통상 관념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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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라인 밑에서 자신만만하고 냉정하게 자신의 중요성을 내뿜고 있긴 해도, 우리가 읽는 기사들은 천사들의 비밀 회의 후 나온 초자연적인 칙령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전망 좋은 사무실에서 머핀과 커피를 앞에 놓고 골치 아픈 회의를 해가며 그럴싸하게 기사 목록을 만들고자 분투하는, 보통은 다소 피곤에 절고 압박에 시달리는 편집자 집단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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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이나 규정하기 어렵고 다종다기한 이 현실이 앞으로 어찌될 것인가에 대해 언론은 그저 피상적인, 가끔은 엄청나게 잘못된 지도를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좀 지나칠 정도로 고르게 합의된 듯 보이는 관점과 맞닥뜨릴 경우, 플로베르의 마음속에서 경종이 울렸듯 우리 마음속에도 경종이 울려야 한다.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서체와 가장 권위적이며 믿음직한 헤드라인 아래 숨어있을지 모를, 잠재적으로 심각한 바보짓에 대해 항상 회의적인 태도로 경계 태세를 유지해야 한다.


플로베르가 문학적 상투어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미디어의 상투어에 눈을 부릅뜨고 대해야 한다. 전자는 소설을 파멸시키고, 후자는 국가를 파멸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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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히 말해, 이것이 해외 뉴스의 임무가 되어야 한다. 우리와 '별개인 문제인 것에 주목하도록' 애씀으로써 우리와 다른 나라의 국민들이 서로의 만남을 상상하고 실질적인 원조를 하며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뉴스의 심리학적인 존재 이유와 연결지어보면 해외 뉴스는 우리가 원근감을 회복하도록 도와야 한다. 한 사회 안에서만 살다보면 우리의 특정한 문명이 주는 이점, 다시 말해 상대적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법률, 사회적 관습, 교육적 전통, 수송망 등에 대해 고마워하기는커녕 그것을 인지하는 것조차 잊어버리기 쉽다. 우리는 그걸 성취하기가 얼마나 지난했는지 깨닫지 못한다. 다른 나라들은 우리나라와 우리 삶의 방식에 대해 평가할 수 있는 척도를 제공하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나라 특유의 기벽, 맹점, 강점을 보도록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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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 속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쏟게 되는 것일까? 어째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걱정거리와 동떨어진 것에 귀중한 정신적 자원을 기꺼이 소비하는 것일까? 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이 작품이 겉보기에는 2000년 전 이탈리아 반도에서 일어난 특정한 정치적 음모를 다루고 있어도, 실은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적절하게 전해질 경우, 뉴스는 두 가지 차원에서 작동할 수 있다. 뉴스는 표면적으로 특정 시간과 장소, 지역 문화와 사회적 집단에 관한 일련의 사실들을 보여주는 구체적 사건을 다룬다. 이 사건들이 우리의 경험 밖의 일일 때 사건의 구체성은 지루하게 느껴지기 쉽다. 하지만 그 특수한 것의 한층 아래에는 보편적인 것이 숨어 있다. 기사의 시간적 지리적 배경을 초월한 인간 본성의 변함없는 근본에 바탕을 둔 심리학적 사회적 정치적 주제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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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203992


피트 수자, 백악관 전속 사진사가 찍은 오바마의 사진. 우리도 이런 대통령.. 사진의 위력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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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들은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만들기도 한다. 경제지표로 한 국가를 평가하는 것은 혈액검사 결과를 통해 어떤 사람을 다시 그려보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인격과 개성의 전통적인 표지들을 한쪽으로 밀어놓은 채, 크레아티닌 수치가 3.2이고 젖산탈수소효소 수치는 927이며 백혈구 수치는 (시야당) 2, C반응성 단백은 2.42라는 사실을 한 사람을 기본적으로 설명하는 분명한 지표로 삼을 때 그렇다.


인간에게 혈액이 그런 것처럼, 국가에 있어서 통화는 끊임없이 순환하며 국가의 생명을 유지하는 매개체다. 통화는 미래를 가장 잘 설명하는 데이터 중 일부를 암호화한 형태로 운반한다. 그 표본을 추출하는 것이 대규모 정부 금융연구소의 임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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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체제에서 전 세계 GDP 규모는 70조달러에 이르고, 국제 채권시장 규모는 100조 달러의 가치를 지니며, 파생상품시장은 791조 달러에 달한다. 전 세계 부채 규모는 50조 달러로 추산되며 유럽연합의 부채는 17조, 미국의 부채는 16조 달러에 이른다(1초에 1달러씩 쓴다고 햇을 때 1조 달러를 다 쓰려면 3만 1000년이 걸린다). 이 경제 체제에서는 가장 부유한 상위 2퍼센트의 엘리트 계층이 전 세계 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반면, 전 세계 10억 명이 가난에 시달리며 산다. 이런 수치들은 은하수 안에 4000억 개 별이 있다거나 우주를 가로지라는 데 930억 광년이 걸린다는 등의 천문학적 통계 수치처럼 사람을 멍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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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때는, 경제학의 장엄함과 복잡함 앞에서 자신이 초라하다는 느낌을 선뜻 받아들일 수도 있다. 신학에서는 작디작은 인간의 자아가 신성한 존재를 알현했을 때 느끼는 경외감을 라틴어로 '미스테리움 트레멘둠 mysterium tremendum' 즉 '두려운 신비'라고 하는데, 신학자들이 종종 이런 경험을 토로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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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자들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런 뉴스 기사를 대한다. ... 하지만 영업사원이나 공장의 주임으로 살아가는 게 어떤 의미인지와 같은 질문은 투자자들과 무관하다. 경영 방침을 고민하고, 구내식당을 지을지 구상해보고, 스자좡에 생산 시설을 신축할지 떠올려보거나, 원자재의 원산지를 궁금해하거나, 좀더 넓은 인류의 차원에서 사업의 의미를 따져보는 일도 마찬가지로 관심 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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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오로지 경제 용어로만 작성하거나, 회사 전체를 +1.20이라고 요약하거나, 직원 8000명의 직장생활을 총매출 375.776으로 압축하는 행위들은 마치 <오만과 편견>처럼 복잡한 소설을 등장인물들의 은행계좌 원장으로 간단히 정리해버리는 것과 같이 한계가 명확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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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경제 뉴스에 나오는 숫자와 그래프는 단지 우리가 건설한 세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이야기와 이미지를 간략한 기호로 속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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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가 우리에게 소개하는 수백 명의 (평화운동가부터 화가, 스포츠 스타, 신경과학자에 이르는) 셀러브리티 중에서 우리에게 진정 가치 있는 사람들, 우리가 보다 성공적으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도록 영감을 줄 수 있는 태도나 업적을 지닌 사람들을 골라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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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심은 처음에는 굴욕감과 열패감을 동반하며 일어나는 감정이지만, 이를 통해 우리가 시기하는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근본적인 질문을 가만히 던질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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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유명인사의 유년기에는 (거의 틀림없이) 거절의 경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 경험 없이는 명성에 대한 한결같은 희구란 있을 수 없다. 부모 중 한쪽이 그에게 무관심했거나, 그와 정서적인 교류를 하지 않았거나 다른 형제 자매에게 더 관심을 기울였거나, 그것도 아니면 일찍 죽었거나. ...

안타깝지만 당연하게도, 명성을 획득한다고 해도 어린 시절에 겪은 모멸감은 거의 사라지지 않는다. 그가 품은 진짜 소원은 성공을 통해 부모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는 게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 사랑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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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탄처럼 희생자를 직접 볼 필요가 없을 때, 상처의 정도는 더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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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니타스: Vanitas. 허무, 덧없음, 헛됨 등을 의미하는 라틴어. 17세기 유럽에서는 '바니타스 정물화' 양식이 유행했는데 이 그림들은 해골, 촛불, 모래시계 등을 사용하여 인생의 덧없음을 상정적으로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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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o Tinto  세계 2위의 광산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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