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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디스 창고/문학

[김영희] 한국사회의 미디어 출현과 수용: 1880-1980


한국사회의 미디어 출현과 수용: 1880-1980

저자
김영희 지음
출판사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8-12-1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우리나라에 신문, 잡지, 서적, 라디오, 텔레비전은 언제, 어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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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와 관련한 최초의 신문기사는 1920년 무선으로 음악을 전할 수 있는 선진국의 첨단기술을 소개하는 간단한 외신기사였다 (<조선일보>, 1920723). 그 후 1924년 총독부 체신국의 시험방송이 시작되기 직전 편리한 무선전화라는 제목의 한 신문기사는 라디오를 무선전화라고 부르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최근 구미 각국과 일본에서 크게 유행한다고 보도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에서 라디오 방송 설립이 추진되면서 이에 관심을 갖고 총독부 체신국에 무선실험실을 설치하여 192411월 무선시험방송을 시작하고, 19256월부터 출력 20w로 매주 4회 정기적인 시험방송을 실시하였다.

 

-라디오는 영업활동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경성방송이 개국하자 경성 중심가의 상점들은 라디오를 가게 앞에 설치하고 그 소리를 들려주어 손님을 유인하는 상술을 개발한 것이다. 라디오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도시의 풍경이었다. 또한 라디오 안테나는 점차 가정에서 그 용도를 찾아 유성기와 함께 상류층의 문화생활의 필수 요소로 간주되기 시작하였다.

 

-라디오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 대중예술인들로 전환해 간 기생들이 라디오의 속성을 이해하고 적응해갔다. 그들은 창과 판소리를 부르고 가야금, 대금 등의 국악연주를 하던 기생이라는 신분의 여성과 광대로 취급되든 사람들은 방송을 통해 대중예술인으로 전환해갔다. 193418일 경성방송의 프로그램이 일본에 중계되었는데, 그 프로그램의 하나로 평양기생 출신 왕수복이 유행가를 부른 것이 유명하다.

 

-이 무렵에는 음악 보급과 레코드 판매 과정의 관계와 라디오의 영향에 대해서도 정확히 이해됐다. “라디오가 음악을 보급시키고 라디오에 의하여 사람들의 귀는 길리어지고 그 뒤로 레코드가 팔려나가는 것으로 보았다.

 

-1933년 이중방송이 실시되어 (경성방송) 조선어 방송이 활성화되면서 극장무대에서 공연한 것을 방송으로 그대로 옮기는 형식에서 벗어난 순수한 라디오 드라마가 출현하기 시작됐다. 라디오 드라마는 점차 연극이나 영화와 같은 하나의 새로운 예술의 장르로서 인정되기 시작했다.

 

-미디어 보급의 전제조건으로서 1930년대 이후의 미디어 통제 상황을 간단히 살펴보면, 1931년 만주사변을 전후하여 언론사상통제가 강화되기 시작하면서 그러지 않아도 여러 유형의 통제와 탄압을 받고 있던 미디어가 원활하게 보급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19368월 불온문서임시취체령, 193612월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 19377월 정보위원회 설치를 통한 정보선전의 강화, 19384월 국가총동원법, 1941년 신문지 등 게재제한령, 19413월 개정치안유지법, 1941년 언론, 결사 규제법, 194112월 조선전시형사특별령, 1943년 출판 사업령 등 언론출판의 자유를 제한하는 각종 통제법령들이 채택된 것이다.

 

-해방 이후 활기를 찾은 한국사회에서 언론의 자유를 향유하고 이용하려는 것이 8.15 해방 이후 가장 큰 움직임이었다. 이러한 조류 속에서 신문을 위시로 한 출판계의 혼란이란 동터진 물결과 같이 것잡을 수 없었다. 거리거리에 출판사의 간판이 음식점 간판과 억개를 겨누고 속출하였던 것이다. 먼저 신문 발행 상황을 살펴보면, 해방 이후 서울에서 <조선인민보>, <민중일보>, <자유신문>, <중앙신문>, <신조선보>, <해방일보>, <대동신문>, <동신일보>, <한성일보> 등이 창간되었고 1940년 일본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던 <조선명?> <동아일보>가 복간되었다.

 

-우리나라는 당시 1953뇬 문화국으로서 세계의 2류 국가로 평가되었다. 이 무렵 계속적으로 극영화를 제작하는 나라는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을 포함해 몇 나라에 불과한데 우리나라는 16mm이기는 하나 전쟁 중에 극영화 생산이 10본 이상이라는 통계는 전혀 빈약하지 않다. 1954331일 정부에 의해 국산영화의 보호 육성책의 하나로 입장세법이 개정돼 국산영화관람에 입장세가 면제되면서 우리나라 영화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는 중요한 전기를 맞게 되었다.

 

-19551월 개봉한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은 그 이전에 볼 수 없었던 2개월 간의 장기흥행으로 관객 10만명이 동원되었다. 이를 계기로 영화가 많이 제작되며 영화사에서는 1955년부터 1959년이 한국영화의 중흥기로 부른다.

 

-196412월 민간 상업텔레비전 방송인 동양 텔레비전 이 개국한 이후에도 1965년까지 수상기 보급은 거의 정체된 상태였다. 만화가게에서는 TV세트를 놓고 어린이들로부터 입장료를 받기도 하며 레슬링 시합 같은 인기 프로가 있는 경우는 다방에 ‘TV있음딱지를 붙이고 손님을 끌기도 했다.

 

-미국에서 1920년대 30년대에 새로운 매체인 라디오가 대중화되면서 미국인들의 생활에 폭넓은 영향을 미치고 사회 변화의 기폭제가 되었듯이, 우리나라에서도 전파를 매개로 한 라디오가 지배적인 매스 미디어로 등장했다는 것은 한국사회에 그 이전 시기와는 다른 커뮤니테이션 양상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라디오는 보통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즐기는 매우 중요한 오락수단이 되었다. 1956년 말부터 등장한 <청실홍실> 등의 연속극, <인생역마차> 같은 인생 상담 프로그램, <노래자랑>, <스무고개> 등의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