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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디스 창고/문학

[김승옥] 혁명과 웃음



혁명과 웃음

저자
천정환, 김건우, 이정숙 지음
출판사
앨피 | 2005-11-22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소설가 김승옥이 만화도 그렸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
가격비교


김승옥 혁명과 웃음

 

-새로 출범한 정권의 수장인 장면 국무총리는 제2공화국이 이승만 시대의 부패, 특권과 단절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혹은 청렴한 지도자로서 자신의 면모를 과시하기 위해 점심 도시락을 싸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이후 장면 정권은 도시락 정권이라고도 불렸다. 이는 마치 첫 문민대통령 김영삼이 정권 초기에 칼국수를 청와대의 주요 점심 메뉴로 삼은 것과 비슷한 행동이겠다.

 

-충주비료 관련. ICA은 미국의 대외원조정책 기구이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대외원조정책은 3단계를 거치면서 변했다. 1단계는 ECA(경제협조처) 원조 시기로, 주로 경제적인 지원에 목적을 두었다. 한국전 이후에는 상호안전보장법(MSA)에 의해 방위 목적의 군사원조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부터는 전후부흥을 위한 경제원조 시기로서 FOA(foreign Operation Administration) 시기가 도래한다. FOA 원조는 민간 구호 차원의 원조 성격과 군사원조적 성격을 동시에 갖는 것이었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주도로 19591월에 성공한 쿠바혁명은 안정을 이뤄가고 있었다. 카스트로는 토지개혁 등의 과제를 수행한 초기의 민주주의 혁명의 성격을 차츰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환시키고 있었다. 이 일의 일환으로 102일 무려 5백만 불의 자산을 가진 미국 슈퍼마켓 기업 미니맥스현지 법인이 쿠바 정부에 몰수당했다.

 

-훗날 김승옥은 1964년 대통령선거에서 윤보선이 아니라 박정희를 찍었다고 고백했다. 왜냐? 조숙한 대학생 김승옥은 4.19 이후 집권한 민주당을 위시한 보수세력의 한계를 알았고 그들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김승옥은 민주당 정치인들이 이승만 정권의 하시운보다 어떤 면에서 오히려 더 친미적이고 보수적이라 생각했다.

 

-1960년대 국민배우로 일컬어졌던 <마부>의 영화배우 김승호

 

-4.19 이후 315부정선거 사건, 정치깡패 사건, 4.19발포명령 사건, 장면 부통령 저격 배후 사건, 민주당 전복음모 무고 사건, 3시력 전복음모 사건6대 사건으로 규정하고 관련자들, 민중에게 발포하고 이승만 정권의 전위대로 활동한 이들을 원흉이라 약칭했다. 하지만 혁명재판소가 따로 설치되지 않았다는 것, 또는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이 처음부터 문제였다. 가장 인상적인 최후진술을 한 피고인은 신도환, 1958년 대구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자유당에 입당해 반공 청년단을 앞세워 시위에 참가했다 귀가하던 고려대 학생들을 테러했던 신도환은 세상 사람이 다 이박사를 욕해도 검사는 못한다며 검사를 오히려 훈계했다. “자유당 하에서 검찰이 무엇을 했는지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해야 한다고 했다. 시인 김수영은 이미 19605월에 새까맣게 손때 묻은 육법전서가 / 표준이 되는 한 / 나의 손등에 장을 지져라 / .이육혁명은 혁명이 될 수 없다 / 차라리 혁명이란 말을 걷어치워라.” (육법전서와 혁명 중)

 

-김승옥은 대학생 때부터 소설을 쓰게 된 가장 큰 동기그 때 번역되기 시작한 일본 소설을 읽고 받은 충격이랄까 자극 때문이라고 말했다. 특히 동경대 불문학과를 중퇴한 일본의 대표적인 전후 작가 다자이 오사무와 자신이 비슷하다고 느꼈으며 자기 시대 이야기를 아프고 절실하게 써내려간 엔도 슈샤쿠, 오에 겐자부로 등에게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민주당 내부의 신파, 구파 대립. 신파 구파의 갈등은 1945년 해방 이래 남한 부르주아계급의 분화, 그리고 여기에 맥을 댄 한국 보수야당의 오랜 이합집산 과정을 반영한다. 남한 부르주아 정치세력은 극우세력이 절대권력을 독점하고 부르주아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할 때에는 단결했고, 극우세력이 약화되어 분점할 권력이 있을 때에는 필연적으로 분열해왔다.

 

-특수한 시사용어들은 언어 형태로 된 대중적인 표상이다. 이 언어적 표상 속에는 복잡한 사건의 정황과 문화적 맥락이 농축되어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심경까지 녹아 있다. 에컨대 차떼기당같은 시사용어를 보라.

 

-데모는 시위를 뜻하는 영어 데몬스트레이션의 일본식 줄임말이다. 민주주의와 같은 어근을 지닌 이 단어는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민주주의를 한다. 그리고 민주화된다는 것은 헌법에 정한 대로 국민의 대표를 국민의 손으로 선출하고, 행정.사법. 입법으로 분립된 국가권력이 법대로; 굴러간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민주화된다는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가 인간화됨을 의미한다. 그 인간화의 핵심은 평등이다. 내 자유와 행복의 기초가 다른 인간에 대한 차별과 학대 위에 놓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의 평등. 곧 민주화는 인간됨의 평균수준이 사회 전체적으로 함께 진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11)

 

-‘마라톤 한국에 대한 한국인의 긍지는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인들은 마라톤 경기가 42.195킬로미터로 통일되고 난 뒤부터 빼어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마라톤에 최초로 출전하여 6위를 차지한 김은배는 한 때 비공인 세계기록을 보유하기도 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남승룡이 나란히 1,3위를 기록했다. 해방 이후에도 1947년 제 51회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서윤복이 1위를 하더니 195054회 대회 때는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1,2,3위를 휩쓸었다. 하지만 1960년 제 17회 로마올림픽에서 이창훈, 김연범, 송삼섭, 이상철 네 사람이 출전했으나 이창훈은 20위로 골인했다.

 

-한국에서 스포츠 민족주의는 강대국 틈바구니에 낀 약소국 백성이라는 민족적 열패감을 치유하는 데 자주 동원되었던 이데올로기다.

 

-오늘날 LG그룹의 전신인 락희화학, 반도상사

 

-사바사바 : 일어 사바사바에서 온 말로 뒷거래를 통해 떳떳하지 못하게 은밀히 일을 조작하는 짓. 송건호는 회고에서 해방 직후 총선거 유세장에 나온 국회의원 후보들이 저마다 사바사바 지옥으로부터 여러분을 구하겠다고 연설했다고 한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제1공화국은 사바사바 공화국이었다.

 

-4.19 이후 학생들이 외쳤단 가 남바 사용을 중지하라구호는 국회의원들이 타고 다니는 승용차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가 남바는 차량 검사를 위해 운행하는 새 차들에 대해 한시적으로만 발급하는 임시번호판이었다. 1공화국 때 자유당 의원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다던 새 정권의 국회의원들은 벌서 특권의식에 젖어 이었다. 전국에 굴러다니는 2백여 대의 임시번호 차 가운데 140여 대가 초선 국회의원들에게 제공되었다.

 

-1945년 이후 미국의 지배자들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입각해서, 즉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거나 친중국, 혹은 친소련 국가가 되었을 때 감당해야 할 비용이, 한반도 남반부에 친미정권을 세우고 자국 병사 수만의 목숨까지 희생하여 유지함으로써 드는 비용보다 크다는 판단하에 움직인 것이었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또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진기지로서 충실히 기능했다. 대신 대한민국은 미국이 쳐준 핵우산 아래에서 북한뿐만 아니라 유사 이래 한반도를 계속 침략해 온 일본, 중공, 소련의 위협에 대한 걱정 없이,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한국은 미국이 구심이 된 세계자본주의체제의 충실한 하위 참여자이자, 자본주의 진영의 쇼윈도로서 세계 어느 다른 개발도상국보다 빨리 성장했다.

물론 한미동맹체제의 대가가 달콤한 것만은 아니었다. 미국이 한반도에 전진배치한 핵무기와 4만 명 이상의 정예부대는, 북한, 중국에 엄청난 위협이 되었기에, 한반도와 그 주변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이 총 밀집한 세계의 화약고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한민족 자신에게 무엇보다 가장 큰 대가는 분단의 고착이었다. 미국 군사력의 보호아래에 있다는 것은 민족 통일의 항구적인 연기를 의미하였다. 과연 미국이 한미동맹이라는 동아시아에서의 달콤한 기득권을 포기할 수 있을까? 한미동맹은 곧 한반도의 중립적인 통일, 혹은 미국에 반대하거나 미국을 배제하고자 하는 세력이 주도하는 통일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뜻도 될 것이다.

한국전쟁 종전 이후에도 남북의 한국인들 스스로가 치러야 했던 엄청난 분단비용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남북의 정권은 분단 상황을 구실로 민주주의를 유보하고 인권을 탄압했다. ‘민족의 역량’ (그런 게 있다면)은 군비 경쟁과 분단 유지에 허비되었다. 예컨대 베트남전쟁때 남한은 연인원 31만 명의 청년을 남의 나라 전선에 투입하여 그 중 5천 여 명이 죽고 1만 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1960년대의 한국인들은 마음을 다하여 미국인들에게 고마워했다. 619일 미합중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한국을 방문했다.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이었다. 당시 일본 열도는 흔히 안보투쟁으로 약칭되는 반미, 반정부 시위로 들끓고 있었다. 그해 일본과 미국은 1951년 체결한 .일 안보조약을 개정해야 했는데, 양국이 합의한 조약 개정의 방향에 대해 사회당을 위시한 좌파 정치권뿐 아니라 학생과 양심적 지식인들도 극렬히 반대했다. 새로운 안보조약의 요체는, 일본이 미국이 이끄는 냉전의 하위 파트너가 된다는 것으로서, 일본의 재군비를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미,일 군사동맹을 강화하여 미국의 동북아전략의 일부를 일본이 떠맡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김현, 평론가?

 

-취약한 사회가 만든 거지들. 거지 헌법도 있었다. 벌이꾼, 걸똘마니: 밥을 구걸하여 오는 거지. 조말이: 벌이꾼들이 벌어오는 것을 도맡는 주인격. 흰벌이: 음식점을 돌아다니며 돈을 구걸하고 담배꽁초를 주워오는 일. 티잽이; 도둑질. 시라이: 폐품을 줍는 거지. 서울의 시라이들이 하루에 수집하는 폐품 휴지는 트럭 15분에 달했다. 문산: 나환자. 이들 조직 두로부터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각설이들도 있다. 이들은 전문용어로는 먹네라고 부르는 중년부부의 걸인 가족이다. 이들은 오랜 경력을 지닌 왕초와 여자거지인 뭉치가 부부관계를 맺어 가정을 이룬 경우이다

 

-1960년대. 생활고로 인해 줄이은 자살행렬. 한국 경제는 1957년을 정점으로 성장률이 둔화되었고 1960~61년에 가장 어려운 시기를 경과하고 있었다. 1960년 전체 GNP(국민총생산)2.1퍼센트 성장했지만, 1인당 GNP80달러로 1959년에 비해 오히려 0.6퍼센트 감소했다. 반면 이해 조세부담률은 16.5퍼센트로 오르고 완전실업률이 8.2퍼센트에 잠재실업률은 무려 26퍼센트에 달햇다. 특히 미국이 농산물 원조를 54퍼센트나 대폭 줄이고 미곡 생산이 전년 대비 4퍼센트, 맥류 생산이 0.3퍼세트 감소하는 바람에 곡물가가 23.9퍼센트나 폭등했다. 전국의 도매물가 상승률은 13.3퍼센트였다. 이러한 어려움은 61년에도 계속될 예정이었고, 이 와중에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022일 자 조선일보에 의하면 7월에서 9월까지 3개월 동안 충청도에서만 무려 146명이 자살했다. 그중 무직자가 81명에 농민이 34명이었다.

 

-지금은 쥐약먹다라는 표현을 잘 쓰지 않지만 그 시대 음독은 대부분 쥐약을 먹었다는 뜻이었다. 쥐약 외에 말라리아(학질) 치료약으로 알려진 키니네quinine도 자살 도구로 흔히 쓰였다. 염상섭의 소설 <위협>에서도, 전광용의 <꺼삐ᄄᆞᆫ리>에서도 김승옥의 <환상수첩>에서도 키니네가 나온다.

 

-당시 가난에 찌든, 전쟁의 상처를 벗지 못한, 미래가 없어 보이는 한국땅을 벗어나, 사람들은 미국으로 가는 것을 꿈꾸었다. 그 중에서도 비교적 쉽게 비자를 받을 수 있었던 사람은 미군의 배우자가 된 여성이나 미국인 가정에 입양된 전쟁고아들이었다. 1950년부터 64년까지 약 6천여 명의 여성과 5천여 명의 어린이가 다른 삶을 살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갔다. 또한 45년부터 65년까지 6천여 명 정도의 젊은 학생들이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50년대와 60년대 부산에는 유독 큰불이 잦았다. 전쟁 때문에 인구가 갑자기 늘어나고 도시 공간이 정비될 틈도 없이 엄청나게 팽창하면서 부산은 화재에 완전 무방비 상태였다. 그 가운데 부산을 화도라 불리게 만든 유명한 불은, 53년 발생한 두 건의 화재다. 1월 말 15천여 명의 이재민을 만든 국제시장 대화재와 같은 해 112600여호의 가옥을 전소시키고 27천여 명의 이재민을 발생시킨 부산역 부근 화재가 그것이다.

 

-해방 이전 이북, 특히 서북지역은 전통적인 교권세력이 존재하던 곳이었다. 해방 전인 1943년의 통계에 따르면,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계 사립학교의 70퍼센트가 서북지역에 몰려 있었다. 이남에도 물론 기독교 세력은 있었지만, 그 교세는 이북의 장로교세력에 비하면 턱없이 약했다. 월남한 기독교인들은 원래 이북에서부터 미국 장로교의 강력한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 엘리트 층이었다. 그들은 전혀 배고픈 사람들이 아니었으며, 그래서 해방 후 북한 정권과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 우리에게 기독교는 힘,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돈 자체였다. 우리 배고픈 아이들의 젖줄이 거기에 달려 있었다.

 

-카뮈. 당시 한국 문학계를 주름잡고 있던 이들은 학계에서 소위 전후세대로 불리는 소설가, 시인들이었다. ‘전후세대작가란 대개 1920년 전후에 태어나 한국전쟁 전후에 문단에 등장한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의 의식을 사로잡고 있던 사상이 실존주의, 그 중에서도 알베르 카뮈, 장 폴 사르트르 등의 프랑스 실존주의 문학이었다. 실존주의 열풍의 조짐은 이미 1950년대 초반부터 감지되었다. <현대문학> 등의 문예지가 등장한 1955년 이전에 이미 <사상계> 같은 잡지를 통해 여러 차례 실존주의가 집중적으로 소개되었다. 카뮈에 심취한 조숙한 여중생 두 명이 동반자살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들이 서구나 일본과 동시대, 같은 공간을 살고 있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했다 일본조차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노벨상 수상 작가를 배출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설국>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해는 1968년이다.

 

-1960년대 최고의 섹스 심벌 킴 노박. 마릴린 먼로, 브리짓 바르도와 함께 대표적인 섹스 심벌이었다.

 

-최인훈 <광장> 김현의 글에는 1960년의 소설계 판도가 잘 드러나 있다. 장용학, 손창섭, 김동리,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최인훈. 이 작가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김동리로 1960년대 당시 마흔여덟 살이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좌파와 중도파 지식인의 다수가 북으로 넘어간 이후, 10년 넘는 세월 동안 김동리는 남한 문단에서 최고의 권력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장용학과 손창섭, 이 두 작가는 각각 21년과 22년에 태어난 동년배로 우리 문학사에서 이른바 전후세대로 지칭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한국전쟁과 함께 문단에 등장한 이들은, 60년 이때까지 줄곧 김동리식세계에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특히 장용학은 척결되어야 할 구세대 문학의 대표자로 언제나 김동리를 거론했다. 하늘로 오르려던 용이 피를 흘리고 등천에 실패하고, 그 피에 물든 고을에서 태어난 주인공이 결국 그런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식, 이런 토속적세계관을 상대적으로 젊은장용학이 견딜 수 없어 했다. 그는 우리 문학도 한국전쟁과 더불어 세계사의 정신적 흐름에 동참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60년 당시 지게꾼들이 엄청 많았는데, 이들은 대개 2~5명의 부양할 가족이 있는 가장들이었고 서울 지게꾼의 10퍼센트는 이북 출신, 무려 70퍼센트가 호남 농민 출신이었다.

 

-1960년은 엄밀히 말해 아직 완전한 시청각시대가 아니었다. 그보다는 청각시대에 가까웠다. 라디오가 있는 집은 꽤 많았지만 TV 수상기를 갖춘 집은 한 동네에 한 집 있을까 말까 했기 때문이다. 1960년 전국의 라디오 보급대수는 42만대에 달했지만 61Tv 보급대수는 2만 대밖에는 되지 않았다. TV는 본격적으로 베트남전에 뛰어든 이후 폭발적으로 팔려 보급될 것이었다.

 

-1960년대 발표한 한국 영화. <박서방>, <마부>, <로맨스 빠빠>, <하녀>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의 쿠데타 가능성을 여러 번 경고했지만 장면 정권은 제대로 대처하지 않았다. 박정희 외에도 군 내 불만세력이 많았는데, 장면 정권은 군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고 또한 미국이 자신들을 지켜주리라 맹신했다. 특히 군을 주시해야 한다면서도 쿠데타의 가능성은 없다고 한 <콜론 보고서>를 너무 믿었다. <콜론 보고서>1959년 미국 상원 외교분과위원회의 요청에 의하여 콜론연구소가 작성한 한국 정세 보고서로서, 특히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미국의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이 정권의 몰락을 예견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상계> 조차 민주주의를 급진화 할 때 수반되는 공포피해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진보진영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중립적이거나 민족적인 외관을 갖고 있던 <사상계> 또한 반공의 한 보루였다. 사상계는 월남한 보수주의자 우파의 문화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며, 애초에 미국의 원조 덕에 창간된 미국식 민주주의 신봉자들의 잡지였다.

 

-초기 민주당 내부의 통일 논의에서 적어도 이전까지는 중립화 통일 방안용공으로까지 간주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가을 뭔가 급격하게 달라지고 잇었다. 장면 정권이 이러한 정황에서 가장 반동적인 방침을 택했다. 정권은 문제의 ‘2대 악법’, 데모 규제법’, 반공임시특별볍을 제정하고자 했다. 혁명과 민주주의가 민주당 정권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장치였다.

 

-이승만의 불교정화 지시와 555년의 전국 승려대회. 비구승들이 자해하고 대법원 점거. 사람들에게 이미지 안 좋아짐. 사법의 보루인 대법원이 그렇게 쉽게 점령되었다는 사실에 사람들 당황.

 

-와이로는 일제 시대때부터 사용된 단어다. 일본어 와이로는 매우 분명하고 강하게 뇌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와이로는 분명 뇌물을 의미하지만 좀 더 우회적인 뉘앙스를 품은 말로 사용되었다. 1960년대 당시 와이로라는 표현을 사람들이 즐겨 사용했다는 것은 그만큼 일상 구석구석까지 뇌물문화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동아일보 기자는 20001월 서울 풍경을 공상하며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놀랍게도, 이 첫 번째 대목의 예측은 하나하나가 다 맞아떨어진다.

서울시민은 여전히 황인종이로되 정형, 성형수술일 발달되어 백인 행세가 손쉬울 것이고 인공위성과 원자력의 힘으로 세계는 무척 좁아졌다. 스위치 하나로 방안의 전체가 스크린으로 변하고 각국의 텔레비전 방송을 누운 채로 볼 수 있다.

 

-류승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1960년대 전체와 박정희 정권을 표상하는 두 가지 키워드는 경제제일주의경제계획인데 결론부터 말하면 박정희가 탁월한 추진력으로 달성했다는 경제개발의 성공은, 이미 준비된 것이었다. 민주당 정권은 역사상 최초로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시행하기 위해 매우 구체적인 구상을 하고 잇었다. 물론 민주당의 경제개발계획 구상이 박정희 군사정권의 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민주당의 경제개발 구상은 훨씬 덜 국가주도적이었다. 하지만 국가가 핵심 역할을 하여 실업 문제 해결과 자본 축적을 가장 우선적으로 이루고, 균형 성장과 농업 발전이 중요하다가강조한 것은 공통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장면 정권이야말로 처음부터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한 정권이라는 것이다.

 

-19613월부터 시작될 국토개발 사업은 장면 정권의 명운을 좌우할 것이었다. 이 사업은 정말 전국민적인, 단군 이래 최대 국책사업이 될 예정이었다. 40만 킬로와트의 전력을 더 생산할 수 있는 소양강댐 등 5개 댐을 건설하고, 경지 정리, 제방관개 및 배수, 산립녹화사업을 통해 농촌의 기반시설을 확충하고 위생시설과 도로를 개량하고, 지역학교를 건설하는 것이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었다. 이를 위한 재원은 미국의 잉여 농산물로 조달되고 이를 통해 연인원 45백만명이 동워노딜 예정이었다. 장준하와 <사상계>가 이 국토건설운동의 한 주체였다.

 

-김승옥 <D파이 9 기자의 어느날>

 

-60년대 교육열은 단지 도시 중산층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중산층 주부의 교육열이 치맛바람이라는 말로 표상된다면 땅 팔고 소 팔아서라도자식 공부를 시키려는 농민들의 헌신은 우골탑이라는 가슴 아픈 말로 상징된다. 38선을 넘어 맨 몸으로 월남해서 가족을 꾸리고 북청 물장수 신화를 이룬 ‘38따라지들의 교육열도 대단했다. 이들은 주로 용산구 한남동 기슭에 있는 해방촌 판잣집에 살면서 자식 교육에 고단한 삶의 희망을 걸었다.

 

-의식주의 기본을 위협하는 가난이, 인간의 존엄을 위협하여 인간에 대한 불신을 만들고 죄를 양산해낸다. 쉽게 말해 극단적인 생화록에 몰린 한국 사람들이 택한 길은 두 가지. 자살과 강력범죄이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일견 자살과 강력범죄는 전혀 상관없는, 혹은 정반대 행동으로 보인다. 하지만 둘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많은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들이 인정한다. 자아를 더 이상 온전하게 지킬 수 없는 상황에 치달았을 때, 나를 향한 공격을 통해 고통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수동적 능동성이 자살인데 이는 쉽게 타자에 대한 공격으로 전치된다.

 

-강력범죄의 발생률은 워낙 경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 한국의 범죄율은 박정히 정권이 차차 안정되어가고 경제개발계획이 본격적으로 실시된 64년부터 약 10년간 꾸준히 낮아진다. 또 대한민국에서 가장 범죄율이 낮았던 때는 1988년에서 1992년 사이었다. 고도성장이 이루어지던 시기, 혹은 그 과실이 조금이나마 분배되던 시기에 범죄율도 낮아졌던 것이다.

 

-불경기와 강,절도 등의 강력범죄, 그리고 자살 증감의 상관성은 아주 직접적이며 인과가 뚜렷하다. 그리고 한국 자본주의는 자연법칙처럼 이를 관철해왔다. 세계적으로도 높다는 오늘날 한국의 자살률은 1998IMF 구제 금융 시절 기록적 증가와 2002년의 반등으로 달성된 것이다. 특히 1998년 자살자 수는 전년 대비 42.6퍼센트나 증가했다. 2002녀부터 자살자 수는 IMF 때를 능가하기 시작했다. 2002년 자살자가 2001년에 비해 24.6퍼센트 늘었는데, 이 때 왠일인지 여성 자살자가 더 많이 늘어났다. 2002년의 한국인들은 월드컵 4이나 대선같은 집단적 항우울제를 맞은 듯했지만, 내실은 나빴던 것이다. 그 해 여름과 겨울, ‘대한민국’ds 뭔가 한껏 폼이 났지만 대한민국 개개 구성원들은 더 불쌍해지고 가난해졌다.

 

-배리아트릭 Bariatric Surgery. 위장 절제술

 

-4.19 이후 학생들은 젊은 사자들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박태순<4.19의 민중과 문학>

-미국 소설가 어윈 쇼 <젊은 사자들>

 

-서울 시내에 교통 신호등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59년이다.

 

-버스 차장은 버스 안에서 운전사의 운행을 돕는 일을 맡는 노동자이다. 60년대 초반에는 80년대 안내양처럼 남성 차장이 많았고 원성의 대상이 되었다. 교우관계가 불량하고 성질이 난폭하다며. 안내양이라고 불렸던 이유는 85년 이른바 시민자율버스가 생기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김승옥 <염소는 힘이 세다>

 

-오빠들의 자괴감. 양공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곧 몸에 육박해오는 도덕의 위기를 몸으로 이겨내는 것이었다. 양공주라는 존재는 전쟁과 가난으로 균열되어 산산이 부서진 기성의 도덕, 그리고 무너진 가족윤리의 경계를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내셔너리티와 인종주의로 무장한 민족의 성-도덕에 대한 도전이다. 그래서 한국인 남성들은 한없는 분노와 경멸로 그들을 대한다. 자괴감 때문이다.


보통사람들의 욕망-도덕, 즉 가치평가를 행하는 두 항목인 도덕과 욕망의 모순적 결합체와 그 운동은 아주 단수하고도 보편적이다. 내가, 내 새끼나 가족이 잘 배우고 많이 버는 것. 창녀나 범죄자가 되지 않고 제대로 된 집안에 시집-장가가서 새끼 낳고 잘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