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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디스 창고/문학

[수전 손택] 사진에 관하여


예전에 독서대회 때문에 읽었던 책





사진에 관하여

저자
수전 손택 지음
출판사
이후 | 2005-02-14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비평부문 수상에 빛나는 손택의 최고작 “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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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다, 찍히다.

 

방문을 열었을 때, 눈앞에 있는 것은 붉은 빛이 깜박이며 빛나는 디지털 카메라였다. 그녀는 그 카메라로 내 모습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봤다. 수전 손택이었던가, 그녀를 간단히 묘사하자면 사진에서처럼 또렷하게 빛나는 눈동자와 완고한 느낌의 표정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언제나 말로는 부족하다. , 시 라는 것은 언제나 대상을 완벽하게 묘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사진만이 대상을 완벽하게 담아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책 표지에서 보여준 표정처럼 반쯤 미소지은 채 눈짓으로 나에게 앉기를 권했다.



그의 글 속에서 그녀는 언제나 사진가(혹은 사진작가)를 바라보는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그녀의 카메라가 나를 향하고 있다. 어딘가 발가벗겨진 기분이 든다. 사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녀가 물었다. 사진? 나를 증명할 수 있는 것. 나는 대답했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사진을 통해 경험되고 증명된다. 나는 태어나 단 한 번도 뉴욕에 가본 적이 없지만 타임스퀘어를 안다. 에펠탑의 생김새를, 산마르코 광장을 봤다. 친구의 새로 생긴 애인의 얼굴을 보았고 두 사람이 대관령 양떼목장에 함께 있는 모습을 봤다. 혹은 봤다고 믿는다. 사진은 내가 보았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사진은 순간의 증거이고 나는 사진을 봄으로써 그 순간을 보았다고 굳게 믿기 때문일 거다. 사진은 분명 현실의 가짜, 현실의 복제품일 뿐이지만 현실 그 자체로 인정받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대사회에서 대개 경험보는 것으로 축소된다. 사람들은 그 순간의 공기, 분위기를 느낄 새도 없이 카메라를 수없이 들이대고, 그렇게 포착된 순간은 또 하나의 증거로 남을 뿐이다. 사진에는 사이가 없다. 그 순간 자체만이 존재할 뿐. 마치 큰 빵 덩어리의 얇은 슬라이스 한 조각처럼 날카롭고 단편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뭔가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 맛있는 것, 멋진 것을 그 조각으로 남기길 원한다. 때로 경험 자체는 사라지고 그 표면만이 남기도 한다. 그것은 일종의 껍데기다.



하지만 그 중 몇몇은 예술작품으로서 미술관에 전시되기도 하는걸요. 그녀가 삼각대의 위치를 옮기며 말했다. 물론 사진이 일종의 예술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진이 있는데, 한 쪽은 아름다운 모습을 담아 놓은 것, 다른 한 쪽은 의미를 담고 있는 종류다. 전자의 경우, 많은 사람들은 사진을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삼는다. 때문에 사람들은 실제보다 아름답게 찍히기를 원하거나, 그 풍경의 실제가 어떠할지라도 무조건 더 아름답고 분위기 있게 찍힌 사진을 원한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다르다. 후자는 아름다운 외면이 아니라 뉘앙스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기록을 목적으로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말한 '결정적 순간'과 같은 그 뉘앙스, 매력은 아름답거나 기괴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편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단순히 보는 것 이상의 무엇을 느낄 수 있다. 전자의 아름다운 사진이 기존의 현실을 그저 가져다 아름다움을 포장해 베껴 적은 표절작품에 불과하다면, 후자의 사진은 현실을 '인용'해 새로운 맥락의 텍스트를 만들어낸다. 나는 후자의 사진을 예술이라고 생각해왔다. 전자는 상황의 껍데기를 포착한 것이고 후자는 대상의 '본질'을 단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사진들에서 나는, 긴장감을 느낀다.



회화와 사진, 이 둘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그녀의 목소리만 들릴 뿐, 그녀의 얼굴은 카메라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회화는 사진 덕분에 더 이상 현실의 모사일 필요가 없어졌다. 이 말에 동의해요. 다만 다른 점이라면 회화는 좀 더 쉽게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정도. 사진은 경계가 모호하다. 예술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키치적이고 때로는 무의미하다. 그렇지만 예술이란 인간에 관한 것이고, 그렇게 보자면 카메라 속에 담긴 현실 자체는 언제든 예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현실 자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복제물이라는 카메라의 속성은, 회화나 조각 등 다른 어떤 예술의 종류보다 더 현대사회를 잘 드러낼 수 있다고 본다. 사진에는 기존의 예술에서 추구해왔던 작품의 아우라나 원본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왜 사진을 찍을까요. 이번에는 그녀가 나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하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자신이 바라본 현실을 그리듯 사진가는 극적인, 혹은 다루기 힘든 현실을 포착해 꽁꽁 가둬둔다. 사진을 통해 우리는 모든 과거와 미래의 이미지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을 기록하고자 하는 욕구,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미지를 필요로 한다거나 그 속의 소비논리도 사진을 찍는 이유가 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 강조되는 것은 경험(혹은 보는 것)에 대한 인간의 욕구이다. 그것이 모델의 사진이든 조상의 사진이든, 자연의 풍경이든 그것은 모두 미지의 세계를 두드리는 노크소리와 같다. 우리는 결코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지만, 사진으로 인해 그 문 정도는 두드려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좋아요. 그녀가 카메라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마, 이 글은 한 장의 사진이 될 겁니다. 당신은 나에 의해 기록되었어요. 어떻게 말하면 나에게 소유되었다고 할 수 있죠. 그녀가 웃는다. 당신은 이제 또 하나의 새로운 미지의 문이 될 겁니다.

 

 

 


 

 

"나는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면서 무엇이든 와락 덤벼들어 움켜잡을 태세를 취한 채 거리를 쏘다니며 삶의 현장을 올가미로 잡아 보전할 결심을 했다. 무엇보다도 나의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황의 '본질'을 단 한 장의 사진으로 포착하길 바랐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세종문화회관서 하는 (20세기 근대 사진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매그넘 창립자라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전 '결정적 순간' 다녀왔는데 지금 이 '결정적 순간'이라는 단어를 치는 순간에도 떨린다!

 

사실 가기 전엔 누군지도 모르고 평이 좋기에 갔던 건데 마침 비오는 날이라 사람들도 없었고 동행자도 없어서 진짜 푹 빠져서 우와우와 하고 봤던 것 같다. 하나 빼곤 연출한 사진이 없다니? 신기해

 

여러 테마로 나눠져 있었지만 그냥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는 (마지막 테마의 주제이기도 했던) 휴머니즘, 인간인 것 같다. 여러 정적인 주변 배경은 물론 그 자체로도 의미있지만 인간이 그 속에 들어있을 때 더 큰 생동감과 이야기를 지니게 되므로!

 

사진 속에서 사람을 지우고 그저 배경과 풍경만 보자면 아무럴 것 없는 예쁜 풍경에 불과한데도(여느 블로그에서 볼 수 있을 법한), 그 속에 해맑게 달려가는 여자아이의 뒷모습이나 무릎을 세운 채 고개를 떨군 한 남자의 찰나를 담음으로써 그 순간의 본질과 이야기, 느낌을 온전히 담아낸다. 우와우 정말 신기했다.

 

그의 사진 속에서 모를 심고 있는 아낙네는 금방이라도 저 쪽을 보고 소리칠 것 같고, 잔디밭에 무릎 사이로 고개를 떨구고 있는 남자의 입에서는 금방이라도 한숨이 흘러나올 것만 같다. 가족을 바라보며 일터로 향하는 남자의 뒷모습에서는 솜사탕같은 미소가 흘러나온다.

 

'일상 생활의 평범함 속에서 찾는 삶의 비범함',

멋지다. 우리네 소소한 삶은 이렇게 비범하고 의미있다.

크고 멋진 것을 찬양하기보다 작고 일상적인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게 멋지다.

 

사진의 ''자도 모르는 내가 봐도 이렇게 멋있는데! 얼마나 대단할 사람일꼬. 이렇게 삶에 소신과 주제, 일관성이 있는 사람들이 멋져 보인다.

 

나도 수없이 많은 결정적 순간을 보내고 살아가겠지. 나는 그것이 나의 글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게 편지든 일기든 감정의 배설로 싸지르는 짧고 얕은 글이든, 나는 사진도 못 찍고 그림도 못 그리니까 글로 결정적 찰나를 담아낼 수 있었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려면 책이나 많이 읽어야지.

 

, '찰나'라는 단어가 넘 맘에 들었다. 찰나의 미학."

 

 

 

 

다이안 아버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