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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디스 창고/문학

[재레드 다이아몬드] 총균쇠 읽기 귀찮으면 이거만 읽으면 된다

<총균쇠>

내용이 궁금한 사람들 있음 제발 다 읽지 말고 이거만 보길

재미 대박 없고 정 내용이 궁금하면 뒤에 붙은 에필로그만 읽음 된다

노트북 정리하다가 여기에 옮겨놓고 파일 지워야겠다 싶어서 올림



총 균 쇠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출판사
문학사상사 | 1998-08-08 출간
카테고리
역사/문화
책소개
1만 3천년 동안에 걸친 인류역사의 기원과 인류문명의수수께끼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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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p. 안나 카레리나의 법칙

톨스토이의 위대한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저 유명한 첫 문장이기 때문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이 문장에서 톨스토이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결혼 생활이 행복해지려면 수많은 요소들이 성공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서로 성적 매력을 느껴야 하고 돈, 자녀 교육, 종교, 인척 등등의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합의할 수 있어야 한다. 행복에 필요한 이 중요한 요소들 중에서 어느 한가지만 어긋난다면 그 나머지 요소들이 모두 성립되더라도 그 결혼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우리는 흔히 성공에 대해 한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간단한 설명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중요한 일에서 성공을 거두려면 수많은 실패 원인들을 피할 수 있어야 한다.

 

p.546

유럽인 침략자들이 아메리카 원주민들보다 유리해질 수밖에 없었던 세 가지 궁극적 요인

인간이 살기 시작한 시기가 유라시아에서 훨씬 빨랐다는 점

유라시아에는 작물화할 만한 야생 식물은 물론이고 특히 가축화할 만한 야생 동물이 훨씬 많았으므로 결국 유라시아의 식량 생산이 더욱 우수했다는 점

유라시아에는 대륙 내의 확산을 방해하는 지리적 생태적 장애물이 비교적 적었다는 점. 유라시아는 동서로 퍼져나갔으므로

 

p.555

아프리카인들이 이렇게 다양한 것은 지리적 환경이 다양하고 선사 시대의 역사가 길었기 때문. 아프리카는 북반구 온대 지방에서 남반구 온대지방까지 연결되어 있는 유일한 대륙이며 세계적으로 손꼽힐 만큼 건조한 사막, 광활한 열대강우림, 적도 부군의 높은 산 등에 둘러싸여 있다.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살아온 기간은 그 어느 대륙보다도 훨씬 길다. 우리의 먼 조상들은 약 70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태어났고 해부학적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도 아마 그곳에서 처음 발생했을 것이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오랫동안 상호 작용을 한 덕분에 아프리카 선사 시대의 역사는 아주 흥미진진한데, 그중에서도 특히 두 가지 사건반투족의 팽창과 인도네시아인의 마다가스카르 이주m은 지난 5,000년을 통틀어 인구 이동의 가장 극적인 사례에 속한다. ..

A.D. 1000년 당시 이미 아프리카에 사고 있던 주요 다섯 인종은 일반인들이 대충 흑인, 백인, 아프리카 피그미족, 코이산족, 아시아 인종 등으로 부르는 사람들.

 

영화 <부시맨(The Hods Must Be Crazy)>

 

p.561

아프리카에는 1,500개나 되는 언어가 뒤섞여 있다. 이 언어들을 명료하게 정리한 사람은 스탠퍼드 대학의 위대한 언어학자 조지프 그린버그였다.

*사헬지대

 

p.589

유럽이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할 수 있었던 까닭은 백인 인종 차별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유럽인과 아프리카인의 차이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리적, 생물지리학적 우연특히 두 대륙의 면적, 축의 방향, 야생 동식물 등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아프리카와 유럽의 역사적 궤적이 달라진 것은 궁극적으로 부동산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에필로그 부분에 정리 다 되어있음

 

 

*1994720일 히틀러 암살 기도, 베를린 반란 기도

*개인적 특이성으로 역사에 분명한 영향을 끼친 인물들

알렉산더 대왕, 아우구스투스(로마의 초대 황제), 석가, 예수, 레닌, 마틴 루터, 잉카 황제 파차쿠티(15세기에 광대한 잉카제국을 건설함), 마호메트, 정복왕 윌리엄(1066년 영국을 정복한 노르망디 공), 줄루 왕 샤카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 보편적인 역사, 즉 인간이 이 세상에서 이룩한 업적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여기서 활동했던 거인들의 역사.”-몇몇 인간들이 역사를 바꾼다.


<->반대되는 극단적 견해

프러시아의 정치가 오토 폰 비스마르크 정치가의 일이란, 역사 속에서 걸어가는 신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그가 지나갈 때 옷자락을 붙잡으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인간보다 환경의 힘이 크다.

 

p.614.

역사적 과학은 직접적 궁극적 원인들의 사슬을 연구한다. 대체로 물리학이나 화학에서는 궁극적 원인’ ‘목적’ ‘기능따위의 개념이 무의미한데,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살아 움직이는 어떤 체계, 특히 인간의 각종 활동을 이해하는 데는 그런 개념들이 필수적이다.

 

p.285

인류의 근대사에서 주요 사망 원인이었던 여러 질병들-천연두, 인플루엔자, 결핵, 말라리아, 페스트, 홍역, 콜레라-이 동물의 질병에서 진화된 전염병들이다. 역설적이지만 우리의 유행병을 일으키는 이 대부분의 세균들은 오늘날 거의 인간들에게만 감염되고 있다.

 

질병은 인간을 죽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므로 역사를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이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전시에 사망한 사람들 중에는 전투중 부상으로 죽은 사람보다 전쟁으로 발생한 세균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 더 많았다. .. 과거의 전쟁에서는 반드시 가장 훌륭한 장군이나 무기를 가졌던 군대가 승리하지는 않았으며 가장 지독한 병원균을 적에게 퍼뜨리는 군대가 승리할 때가 많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역사에서 병원균이 맡았던 역할을 보여주는 가장 무시무시한 사례는 바로 1492년 콜럼버스의 항해와 함께 시작되었던 유럽인들의 남북아메리카 정복이었다. 스페인의 잔혹한 정복자들에게 희생된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많았지만 그보다는 스페인의 잔혹한 세균에 희생된 원주민들이 훨씬 더 많았다.

 

폭발적으로 번지고 있는 인간 질병 AIDS는 아프리카의 야생 원숭이가 지니고 있던 바이러스로부터 진화한 것으로 보인다. 중세시대에 자주 유행했던 흑사병(선페스트)

 

p.287

세균도 기본적으로는 다른 생명체와 똑같이 진화한다. 진화의 과정은 가장 효과적으로 새끼를 낳아 그들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장소에 전파시킬 수 있는 개채들을 선택한다. 세균에 있어서 전파라는 용어를 수학적으로 정의한다면 원래의 환자 한 명에 대해 새로이 생겨나는 피해자들의 숫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인간의 질병에서 비롯되는 증상들은 사실상 매우 영리한 세균들이 인간의 몸이나 행동을 세균이 전파되기에 알맞도록 개조시키는 과정이 밖으로 드러난 것일 때가 많다.

 

.. 이 같은 기생충들은 우리가 먹은 동물에게서 전달되지만 뉴기니의 고지대에서 웃음병(쿠루병이라고도 하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성 뇌신경병)을 일으키던 바이러스는 잡아먹힌 사람에게서 잡아먹은 사람에게로 전해졌다. 즉 식인 풍습을 통해 전염된 이 병은 고지대의 엄마들이 쿠루병 환자들을 요리하기 위해 막 잘라낸 머릿골을 아이들이 만지작거리다가 그 손가락을 빨았을 때 전염되는 것.

 

p.291

그러나 일부 영리한 세균들은 인간의 면역성에 굴복하지 않는다. 어떤 세균은 우리의 항체가 인식하는 세균의 분자 구조(이른바 항원)를 변화시키는 속임수를 쓴다. 가령 인플루엔자는 새로운 균종을 진화나 재생시켜 항원을 변화시키기 때문에 설령 2년 전에 인플루엔자에 걸렸던 사람이라도 올해 새로이 나타난 다른 균종으로부터 안전할 수 없는 것이다. 말라리아와 수면병은 항원을 빠르게 변화시킬 수 있어서 더욱 골치아픈 녀석들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골치아픈 것은 바로 AIDS이다. 이 병원균은 한 환자의 몸 속에서도 계쏙 새로운 항원을 진화시키기 때문에 결국 그 환자의 면역 체계를 압도해 버린다.

 

p.293

인류 역사상 가장 지독했던 유행병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2,100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플루엔자였다. 흑사병(선페스트)1346~1352년에 유럽 인구 4분의 1을 죽게 만들었다. 일부 도시에서는 이 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70%에 달했다. 캐나다 태평양 철도(벤쿠버-몬트리올 간 대륭 횡단 철도)가 서스캐처원 주에 건설되고 있던 1880년대 초, 백인이나 그들의 병원균에 노출된 적이 별로 없었떤 이 지역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결핵 때문에 연평균 9%라는 어마어마한 비유롤 죽어갔다.

 

*쿠루병 검색

 

p.308

앞서 우리는 유라시아의 대중성 질병들이 바로 유라시아의 가축화된 군거 동물이 지니고 있는 각종 질병으로부터 진화되었음을 확인

 

p.327

로마 알파벳도 오랜 기간에 걸친 청사진 복사의 최종 산물이었다. 인류 역사에서 알파벳이 생겨난 것은 한 번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시기는 B.C. 2000~1000, 주인공은 현대의 시리아로부터 시나이 반도에 이르는 지역에 살면서 셈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었다. 역사상 모든 알파벳, 그리고 현존하고 있는 모든 알파벳은 궁극적으로 이 셈 알파벳의 조상으로부터 유래되었던 것이다. 더러는(가령 아일랜드의 오검 알파벳처럼) 아이디어 확산을 통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글자 형태를 그대로 복사하거나 수정하여 만들어졌다.

 

p.345

파이스토스 원판. 190873, 크레타 섬의 파이스토스에서 고대 미노스 궁전을 발굴하던 고고학자들은 기술의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물건 하나를 발견했다. 양면 가득 문자가 적혀있었다. 출토된 이후 지금까지 이 원판은 문자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에게 수수께끼 같은 존재였다. 각기 다른 기호의 수(45)로 미루어 이것은 알파벳이라기보다는 음절 문자로 보이지만 아직 해독되지 못했고 기호들의 형태는 지금ᄁᆞ지 알려진 어떤 문자 체계와도 비슷하지 않다. 이것의 연대는 B.C. 1700년경으로 추정되는데 그렇다면 지금으로서는 세계 최초의 인쇄물이라고 할 수 있다.

 

p.347

기술적 진보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 제임스 와트, 토머스 에디슨, 라이트 형제

 

p.348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


=> 발명은 한 사회가 아직 충족되지 못한 어떤 필요를 느낄 때, 즉 어떤 기술이 불만스럽거나 부족하다는 인식이 만연되어 있을 때 이루어진다는 것. 발며악 지망생들은 금전이나 명성에 대한 기대감으로 동기 부여를 받아 이 같은 필요를 감지하고 거기에 부응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가 어떤 발명가가 드디어 기존의 불만스러운 기술보다 우수한 해결책을 찾아낸다. 이 해결책이 사회의 가치관이나 각종 기술과 배치되지 않는다면 사회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사실 이처럼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고 보는 상식적인 견해를 뒷받침하는 발명품은 제법 많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미국 정부는 나치 독일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기술을 발명하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맨해튼 프로젝트를 기획했다.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20억 달러를 소비한 후 3년 만에 성공을 거두었다. 또 다른 예로는 미국 남부에서 재배한 목화를 다듬는 고된 수작업을 대신하기 위해 1794년 엘리 휘트니가 발명한 조면기(면화의 씨를 빼거나 솜을 트는 기계), 그리고 영국의 탄광에서 배수 문젤해결하기 위해 1769년 제임스 와트가 발명한 증기기관 등이 있다.

 

이처럼 낯익은 사례들을 보며 우리는 그 밖의 중요한 발명품들도 모두 필요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 수많은 발명품, 또는 대부분의 발명품은 호기심에사로잡히거나 이것저것 주물럭거리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개발했고, 그들이 염두에 둔 제품에 대한 수요따위는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다. 일단 어떤 물건이 발명되면 그때부터 발명자는 그것의 용도를 찾아내야 했다. 그리고 상당 시간 사용된 이후에야 비로소 소비자들은 그것이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또 어떤 물건은 어느 한 가지 용도를 위해 발명되었지만 결국에는 오히려 예기치 못했던 다른 용도에 더 많이 쓰이게 되었다. 비행기와 자동차, 내연 기관과 전구, 축음기와 트랜지스터 등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발명이 필요의 어머니일 때가 더 많다.

 

토머스 에디슨의 축음기가 좋은 예다. 1877년 에디슨이 처음으로 축음기를 만들었을 때 그는 이 발명품이 소용될 만한 열 가지 용도를 제시하는 글을 발표했다. 거기에는 죽어 가는 사람의 마지막 말을 보존하는 일, 시각 장애자들이 들을 수 있도록 책을 녹음하는 일, 시간을 알려 주는 일, 철자법을 가르치는 일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음악을 재생하는 일은 우선순위에서 상위권에 들지도 못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에디슨은 자신의 발명품에 상업적인 가치가 없다고 조수에게 말했다. 그러나 다시 몇 년 후에는 마음을 바꾸어 축음기 판매 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용도는 사무용 구술 기계였다. 다른 기업가들이 축음기를 이용해 동전을 넣으면 대중 음악이 흘러나오는 주크박스를 만들어 냈을 때 에디슨은 자기 발명품이 사무용이라는 중요한 용도를 벗어나서 그렇게 전락해버리는 일에 반대했다. 그리고 20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에디슨도 축음기의 주된 용도는 음악을 녹음하고 재생하는 일이라는 데 마지못해 동의했던 것이다.

 

p.357

쿼티 자판.qwerty 윗줄 왼쪽의 여섯 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


이 같은 자판 배열은 1873년에 역공학의 산물로 태어났다. 즉 온갖 수단을 다 발휘하여 타이핑 속도를 최대한 늦추도록 고안된 것이다. 이를테면 가장 많이 쓰이는 글자들을 자판의 각 줄에 두루 흩어 놓았고 주로 왼쪽으로 몰아 놓았다.(이렇게 되면 오른손잡이들이 서투른 왼손을 쓸 수밖에 없음). 이렇게 일견 비생산적인 듯한 자판을 설계한 이유는 1873년 당시의 타자기는 인접한 글자들을 연달아 빠르게 치면 글쇠들이 엉켜 버렸으므로 제조업자들이 타자수들의 타이핑 속도를 늦춰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타자기가 개선되어 이 엉키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1932년에 능률적으로 다시 배열된 자판을 시험해 본 결과 타이핑 속도는 두 배나 빨라지고 타이핑에 드는 힘은 95%나 감소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비 qwerty 자판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뒤였다. 그동안 그 자판을 사용하던 수억의 타자수, 타자 교사, 타자기와 컴퓨터의 제조업자 및 판매원 등의 기득권 때문에 그로부터 6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자판의 능률을 추구하는 움직임들은 계속 좌절당하고 있는 것이다.

 

*머스켓 전쟁/머스켓 소총

 

p.370

일본이 총을 포기했던 사례


총기가 일본에 처음 도착한 것은 A.D. 1543년이었다. 화승총(원시적인 총)으로 무장한 두 명의 포르투갈 모험가가 중국 화물선을 타고 상륙. 일본인들은 이 신무기에 깊은 인상을 받고 토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 제작기술은 크게 향상되었으며 A.D. 1600년 이전에 벌써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우수한 총을 더 많이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에는 총기 도입에 역행하는 요인들도 있었다. 이 나라에는 사무라이라는 많은 수의 전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칼이 계급의 상징인 동시에 예술품이었다. 일본에서 전쟁이란 사무라이 검사들 사이의 일 대 일 전투였다. 그들은 탁 트인 곳에 서서 의례적인 말들을 주고 받았으며 우아하게 싸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우아하지 못하게 총을 마구 쏘아대는 평민 병사들 앞에서의 그런 행동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게 되었다. 더구나 총은 외국의 발명품이어서 1,600년대 이후에 모든 외국 문물이 그랬듯 차츰 경멸의 대상이 됐다. 사무라이가 지배하던 정부는 우선 총기 생산을 몇몇 도시에 국한시키기 시작했고, 정부의 허가를 얻어야만 생산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다음에는 정부에 납품하는 총에 대해서만 생산을 허락했고 마지막으로는 정부의 총기 주문량도 감소시켜 결국 일본은 제대로 작동하는 총이 거의 없는 상태로 돌아갔다.

 

p.397

가령 우리는 자이르의 모부투 대통령을 도둑 정치가로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조지 워싱턴을 좋은 정치가로 생각하는 것은 그가 누구나 칭찬하는 좋은 사업에 세금을 썼고 대통령 재직 시절 자신의 재산을 불리지 않아서. 그러나 그는 태어날 EO부터 부자였다.

 

p.398

지배자가 평민들보다 안락한 생활을 유지하면서도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려면


1.대중을 무장 해제하고 엘리트 계급을 부장시킨다.

2.거둬들인 공물을 대중이 좋아하는 일에 많이 사용하여 재분배함으로써 그들을 기쁘게 한다.

3.무력을 독점하여 공공 질서를 유지하고 폭력을 억제함으로써 대중의 행복을 도모한다.


*추장 사회의 특징은 추장의 권위를 강화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이것은 제도화된 종교의 선행 형태였다. 초기 국가에는 각각 초괴 대추장과 같이 사실상 왕에 해당하는 명칭을 가진 세습적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정보 의사 결정, 권력 등을 전보다 더 많이 독점했다. 오늘날의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가장 중요한 정보는 극소수 개인들만이 알 수 있으며 바로 그들이 정부의 각종 부서로 내보내는 정보의 흐름을 통제하고 결과적으로 모든 결정을 좌우한다. 예를들면 1963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닥쳤을 때 케네디 대통령은 50만 명의 사람들을 삼켜버릴 수 있는 핵전쟁에 대한 정보와 논의를 자기가 임명한 국가안정보장회의 간부 10명에 국한시켰다. 나중에 최종 결정을 내리는 일은 자신과 각료로 구성된 4명으로 제한했다.

 

*p.405

현대 국가에서도 학교 교회 정부 등이 국민들에게 이 같은 희생 정신을 강력히 주입시키고 있으므로 우리는 이런 태도가 인류 역사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떤 획기적인 변화임을 흔히 잊어버린다. 모든 국가에는 국민들에게 국가를 위해 필요하다면 죽을 수도 있는 마음 자세를 종용하는 표어가 있다. 영국에서는 국왕과 조국을 위하여(For King and Country), 스페인에서는 신과 에스파냐를 위하여‘(Por Dios y Espana)라는 식이다. 이러한 정신은 16세기 아스텍 전사들에게도 있었다.

 

p.407

우리에게 가장 낯익은 이론은 프랑스 철학자 장 자크 루소의 것으로 그는 국가가 사회적 계약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그 사회적 계약이란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계산해 보고 단순한 사회 보다는 국가에서 사는 것이 더 낫겠다는 데 의견이 모아져 단순한 사회를 자발적으로 없애 나갈 EO 이루어지는 합리적인결론이라는 주장. 그러나 현실을 아무리 관찰하고 역사적 기록을 뒤져 보아도 그처럼 냉철한 선견지명이 있는 고상한 분위기에서 국가가 형성되었던 예는 한번도 없었다. 작은 사회 단위들이 자발적으로 주권을 포기하고 더 큰 단위에 합벼오디는 일은 없다. 다만 정복당하거나 외부 압력 때문에 어쩔수 없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