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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글

속상하다.

교육 기부 장학금 끝나고 처음으로 센터에 나갔다. 어제 홍이 생일 축하 겸 송년회로 새벽 4시까지 노는 바람에 아침 9시까지 일어나 씻고 가기가 굉장히 귀찮기도 했지만 시험을 핑계로 2주 동안이나 못 본 애들을 본다니 설레는 마음이 더 컸었다. 뛰어댕기는 애들 잡아가며 문제 풀리는 게  쉽지만은 않았지만 아, 그래도 내 시간 집에서 빈둥대며 버리는 것보단 여기서 이렇게 지내는 게 훨씬 좋구나 할 정도로 즐거웠다. 처음에는.

한 아이가 공부를 시작하고 나니 말을 안 듣기 시작했다. 같이 수수께끼 놀이를 할 때까지만 해도 좀 격하기는 해도 말 잘 듣는 2학년 짜리 체구작은 아이었는데 공부를 좀 시키려고 하니 답을 전부 찍어버리고 틀리면 반대 부등호로 다시 찍으면 되지 않겠냐고 우겨댔다. 풀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도와준다고 혼을 내니까 종이를 집어 던지고 심한 욕을 했다. 순간 덧셈 계산을 못해서 창피해 그러나 싶어 친형이랑 여자친구 애한테 몰래 물어봤는데 잘 푼단다. 장학금 스티커가 걸렸을 때나 무서운 여자 선생님이 계실 때만은 잘 푼다고. 급 예전 우리 정교사 선생님이셨던 분의 카리스마가 떠오르며 자괴감이 들었다. 아이들은 나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몇 번이고 얘기를 해 봐도 혼을 내도 전부 문제를 찍으려고 하길래 나도 화가 나서 그럼 풀어봤자 의미 없으니 풀지 말라 하고 핸드폰을 뺏었다. 핸드폰을 뺏기니까 애는 애 나름대로 열받아서 자기 형을 때리고 심지어 나도 안쓰는 욕까지 하고 난리난리가 났다. 분노 조절이라고 해야 하나 기분 관리를 못 하는 아이들이 많긴 하지만 그렇게 폭력적인 경우는 처음이라 나도 너무 화가 났다. 적어도 푸는 척이라도 하면 돕기라도 할텐데 이미 책은 치워버린지 오래고 핸드폰을 받기 전엔 안나갈 기세로 욕을 해대더라.

옆에 다른 선생님이 계셨지만 참견 않고 가만히 있는 걸 보면 느낌상 이런 일은 늘 일어나고, 항상 선생님이 거의 다 풀어주는 식으로 문제를 풀렸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대체 그 애 비위를 왜 맞추고 앉아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런 식으로면 가르치고 싶지도 않았고, 심지어 내가 그렇게 하는 게 애한테 좋은 것 같지도 않다. 센터에서는 그렇게 해서라도 아이들 많이 남기는 게 편하고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애가 하도 소란을 피우길래 여기서 얕잡혔다간 앞으로는 택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음 욕을 듣는 순간 멱살 잡아 들어올려서 문밖으로 데려다 밖으로 쫓아버렸다.

핸드폰을 숨겨놓은 채 애를 쫓아버리니까 같이 다니는 친형이 핸드폰을 찾으러 올라와서 같이 얘기했더니 자기가 어머니한테 공부때문에 핸드폰을 못 받았다고 전한다고 했다. 나는 다음 주에 언제 올 지 모르니 다음에 돌려주라고 다른 선생님께 부탁하고는 건물을 나왔다. 아까 사라졌던 애가 눈이 빨개져서는 건물 앞에 서 있었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혹시 분노조절 못하고 뭔 일 치는 거 아냐 싶어서 걔네 형 전화번호를 알려고 한 여자애한테 전화했다. 내가 부탁한 그 선생님이 핸드폰을 지금 애한테 가져다주고 있다고 했다. 좀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나보다 걜 더 잘 아는 사람이고 하니 알아서 한거겠지 하고 그냥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서 머리가 복잡해졌다. 형도 물론 장난기 많고 공부를 싫어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선생님이라는 존재를 인정하고 공부도 하려고는 한다. 구김살 없고 바른 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생이 그렇게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을 못 받았던가 하는. 그랬다면 내가 한 행동이 옳지 않았던 게 아닐까. 다른 사람들처럼 받아주고 어르고 달래가며 풀려야 했던 건 아닐까. 그러다가도 또 오히려 그런 특별대우가 애를 그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머리가 복잡해졌다. 속상하다. 분명 아이의 잘못은 아닐텐데. 어딘가 환경이, 뭔가 겪은 일들이, 그 작은 아이의 마음 어딘가를 건드려서 그렇게 된 것일텐데 그걸 알기에 나는 인간에 대해 너무 모르고 그래서 결국 도움은 되지 못할망정 상처만 더 주었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속상하다. 나의 2013년의 마지막 날은 이렇게 속상하고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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