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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끄적/글

B+의 쪽팔림


지난 학기, 그러니까 내 마지막 학기의 성적은 세 개의 C+와 네 개의 B+로 이루어져 있었다. 평점이 거의 2점이나 떨어졌다. 6,7학기를 다니며 채워야 할 학점과 복수전공 따위의 복잡한 기준들 사이에서 남은 힘을 모두 써버린 탓이다. 학기 내내 듣고 싶은 수업만 듣고 하고 싶은 과제만 열심히 했다. 게다가 땡땡이는 거의 밥먹는 수준으로 했다. 출석체크를 안 하는 한 수업은 거의 들어간 적이 없을 정도로 난장판이었다. 합리화를 좀 하자면, 싫은데도 자리를 지켜가며 꾸역꾸역 수업을 듣는다고 성적이 오르는 것은 아니고, 수업을 다 빠진다 해도 시험 전날 진심으로 공부하면 평타라도 칠 수 있다는 경험에서 나온 땡땡이었다. 물론 두 경우 모두 A대는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 선택이었다만은.. 어쨌든 온통 C밭일 줄 알았던 터라 만족스럽게 성적확인 창을 껐던 기억이 난다. 내 가설을 또다시 확인한 것 같은 느낌이라 살짝 기분이 좋기도 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B+가 상당히 쪽팔린 성적이라는. 내가 지금껏 받은 A+와 B+와 C+를 비교하면 그렇고, 막학기에 받은 B+와 C+를 비교해도 그렇다. 대충 공부한 척을 하고, 요령을 부리고, 대충 교수님의 성향과 취향에 따라 점수를 잘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으로 과제나 답안을 작성해 마감일 전에 제출하면 늘 B+를 받았다. 그러니까 내게 B+는 대충 출석체크를 하고, 대충 발표를 하고, 최소한의 점수를 받기 위해 눈치를 보며 공부하면 받는 점수였다. A+나 C+는 다르다. 해당 과목에 영혼을 담아, 말이 좀 이상하지만 진심으로 공부한 과목은 대개 A+를 받았다. 발표조에 덤비고, 교수님께 꾸중받은 오기로 더 열심히 레포트를 써 가고, 밤새도록 고민과 수정을 거듭해 희곡과 시를 써내고, 한 작가에 빠져 프리라이더들에 대한 증오도 잊고 3명 분의 발표 보고서를 밤새서 만들어 냈을 때 내 성적은 가장 좋았다. 공통점은 내가 당시에 진심을 다해 공부하고 나를 표현했다는 점이다. 교수님의 코멘트에 그건 아니지 않냐며 반박하고, 청년심리학 과제를 쓰며 밤새 눈물 콧물 쏟아내며 나의 어그러지고 못생긴 내면을 A4 두 장에 매주 쏟아냈을 때도, 나는 좋은 점수를 받았다.

C+를 받은 수업도 나름의 공통점이 있다. 내가 내 감정에 솔직했을 때다. 맨 처음 C+를 받았을 때는 내가 무지막지하게 짜증났던 첫 연애를 끝내고 나서인데,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C라는 성적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모범생이었다) 공부고 뭐고 다 때려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세계정치 과목이었는데 어차피 다 잊어버릴 거, 내가 슬픈데 공부는 해서 뭐해, 하며 진짜 백지상태로 교실에 들어갔고 거의 빈칸인 시험지를 시험시작 15분 뒤 80명 중 가장 먼저 내고 나왔다. C+를 받은 수업들에서 나는 대개,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이해하고 수업 필기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딴 짓을 했다. 아는 게 없으니 시험엔 그냥 내 생각을 적어 냈고, 과제는 둘 중 하나였다. 내 맘대로 뜬금없는 헛소리를 하거나 아예 꾸역꾸역 칸만 맞춰 내거나. 적어도 교수님의 생각에 맞춰 눈치를 보며 공부하진 않았다. 포기하면 오히려 당당해진다.

C+보다 B+가 더 쪽팔린 이유는 내가 눈치를 봤기 때문이다. 수업에 빠졌는데 안 빠진척을 하려했고, 내 생각을 쓰려고 하기보다는 그래서 이 문제의 의도가 대체 뭔지를 먼저 파악하려고 했다. 알바 면접을 가기 위한 시험 땡땡이(기말 시험도 땡땡이 친 적이 있다;)에 점수를 조금이라도 덜 깎이기 위해서 이상한 핑계를 거짓으로 만들어 냈던 과목이 그랬고, 오기를 부렸지만 진심을 담지 않고 대충대충 공부한 과목들이 그랬다. 그렇게 눈치보며 받아낸 성적들은 지금, 너무 평범하고 지루하다. B+ 성적 안에 진짜 나는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공부하고 생각하고 그들의 눈치를 보는 초라한 나만 있었다. 

물론 열심히 공부하고도 B+가 나온 적이 있고, 완전 놓고 내맘대로 살았지만 B+이 나온 적도 있다. 하지만 뒤돌아 생각해보면 이 때도 최선을 다해 내가 나로서 생각하거나, 최선을 다해 다 놓아버리거나 하진 않았던 것 같다. 앞으로 삶을 살면서도 내가 할 일들이 많이 생길텐데, 그게 어떤 일이든 절대 B+를 받고 싶진 않다. C를 받아야 하는 게 아직 무섭기는 하다. 아직 나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고, 부모님을 의식하고, 많은 사람들을의 생각을 뇌 속에 두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력하려고 한다. C를 받았다고 해도 내 마음가짐이 문제다. '하하, 나는 그래도 잘 살아왔어' 하면 잘 산 게 되는 거다. 난 적어도 내 삶에 솔직했고, 그랬기에 쪽팔리지 않다고. 


으, 말은 이렇게 하지만 잘 해낼 수 있을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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