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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탈출/유럽

런던 이야기 _2일



둘째 날.


런던에 왔으니 뮤지컬을 봐야지, 하고 민박집 팜플렛을 뒤적거렸다.


원래는 퀸 음악으로 만들었다는 '위 윌 락유'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무산.


대각선 침대에서 로션을 바르던 언니가


"나 어제 보고 왔는데 공연 끝나기 직전이라 아마 자리 안 풀릴거야" 라고 알려주었다.


감상을 물어보니 무지 재미있었다고 해서 더 속상했다.


일단 찾아가보는 시도 정도는 해볼 수도 있었으나, 며칠 안 되는 런던 일정이라 쉽게 포기했다.




남은 좌석이나 예약 취소된 자리를 싼 가격에 노려야 하는 나로서는 선택권이 그리 많지 않았다.  


매일 아침 10시부터 각 극장에서 파는 데이시트를 사거나 레스트 스퀘어에서 싸게 풀리는 표를 사는 방법이 있는데


아침부터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검색해보다, 데이시트 표를 노려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위키드는 오리지날 팀이 내한왔을 때 이미 봐서 패스, 라이온킹은 후기는 좋지만 왠지 끌리질 않아서 패스.


공연 관계자들도 칭찬하고 갔다는 이모님의 적극 추천과 몇 언니들의 부추김으로,


'빌리 엘리엇'을 보기로 했다.





허겁지겁 영국에서의 첫 아침 식사를 마치고 극장으로 향했다.


빅토리아 팔레스 극장으로 가려면 이렇게 생긴 빅토리아 역을 지나야 했다. 


내 여행의 목적지인 이곳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떠나고 다시 돌아오는구나, 싶어 마음이 달떴다.


역의 모습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서 나의 바보짓이 베일을 벗는다.


늦을까봐 걱정하며 허둥지둥 도착했는데 알고보니 티켓 창구 오픈 시간은 10시..


내가 맞춰 간 시간은 9시..


블로그에서는 줄 서서 기다린다고 하던데 아무도 없네? 내가 일등이다!


했지만 문 앞에 적힌 설명을 읽어보니 내가 1시간이나 일찍 온 거였다. 


망할 나 놈.. 아무래도 그 추운 날씨에 한 시간이나 앉아 기다릴 수는 없어서 


주변 구경을 하기로 했다.


오는 길에 무슨 교회 표지판 같은 걸 본 기억이 있어서 무작정 그 쪽으로 걸었다.






가는 길에 본 위키드 극장.





그리고 도착.





추워 죽겠어서, 사진이고 뭐고 대충 몇 장 찍은 뒤에 내부로 들어갔다.





거대한 십자가.


사진에는 그 웅장한 느낌이 제대로 담기질 않았지만 실제로 보면 크기가 엄청나다.






조금 신기했던 것은, 


출근하기 직전의 회사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앉아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일터로 향하기 전 지난밤 누군가에게 주었던 상처를 되짚어보거나


아픈 어머니가 빨리 낫기를 기도하는 중이었을 수도 있고,


혹은 남은 일주일도 충만하게 살 수 있기를 속으로 되뇌고 있겠지.


어제 산 복권이 당첨되기를 바라는 사람도, 


"어제의 잘못은, 한 번만 넘어가주세요"하며 신의 선처를 바라는 사람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냥 조용히 들어와, 앉아 기도하고, 조용히 초를 밝히고 밖으로 향하는 게 참 좋아 보였다.


물론 문화나 환경적 차이 때문에 어쩔 수는 없겠지만,


내가 어린시절 기억하고 있는 북적북적하고 시끄럽던 교회의 모습과 너무 달라서


나에게도 이런 안식의 공간이 있음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9시 40분쯤 교회 밖으로 나와 다시 극장으로 향했다.


그새 몇몇이 그 추운 중에도 줄을 서 있었다. 


한 6명쯤 앞에 있었나, 교회에서 조금 더 일찍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내 차례가 오자 처음엔 1층 좌석을 주려고 했다.


블로그에서 '1층 말고 차라리 3층에 앉으세요!' 라는 조언을 읽은 나는


3-4층 자리로 달라고 했고, 28유로 정도에 표를 샀던 것 같다.





그리고 나와서는 근위병 교대식을 보려고 했다.


'보려고 했다'고 쓴 이유는 결국 못 봤기 때문이다.


나는 길치였기 때무네.... 


여행 책자에서 The Mall 쪽에서 보면 더 잘 볼 수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그 쪽을 찾아 걷는데


아무리 걸어도 안 나오는 거다.


GPS를 켜고 구글 지도도 켜서 따라갔지만 세인트 제임스 공원만이 나올 뿐이고..


결국 시간도 훨씬 지나 버려서 포기하고 공원 구경이나 했다.


그래도 공원이 예뻐서 기분이 나쁘거나 속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잔디는 푸르고, 나무들은 울창하고, 청둥오리로 추정되는 생물체들이 연못 위를 떠다녔다.


이런 공원이 몇 개씩 된다 하니, 참 살기 좋다.













공원에서 만난 청설모.


청설모 맞겠지? 다람쥐는 확실히 아닌 것 같다. 


다람쥐보다 덜 귀여운 걸 보면.







나는 새 종류가 참 좋은데, 


그래서인지 저 청둥오리 같은 아이들이 유유히 헤엄치는 모습에 반했다.


새는 참 예쁘게 생긴 것 같다.


그래서 한 때는 조류관찰 동아리라는 새랑 포스터를 볼 때마다 들어가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었는데


지금 와서 보면 그 곳은 드립도 못 치고 유머감각도 꽝인,


게다가 1인 1닭 불가능한 나 따위는 그 때도 지금도 범접할 수 없는 대단한 곳이다.


감히 그런 곳에 들어가길 꿈꿨다니.








그렇게 돌고 돌아 내셔널 갤러리에 도착했다.


여긴 제대로 찾아온 걸 보면 그래도 아주 못 살 정도까지는 길치가 아닌갑다.


도착하자마자 '여기가 내셔널 갤러리었다니.. 어제 왔던 곳이잖아!' 하고 멍-했다.


낮 시간이라 그런지 전 날과는 다르게 앞 트리팔가 광장 이곳 저곳에서 다양한 공연을 하는 중이었다.













런던, 파리를 구경하면서 부러웠던 것 중의 하나. 


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을 공짜로 구경할 수 있다. 


런던에서는 입장료는 없지만 저런 식으로 기부금을 받기도 했다.


파리에서는 대부분 입장료를 받았지만


나는 미술사학 전공생으로 국제학생증을 발급 받아갔기 때문에 모든 미술관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심심하면 들어가 구경하고, 나왔다 또 구경하고, 


할 일 없으면 그림 보고, 갈 곳 없으면 미술관으로 산책을 갈 수도 있고. 


부러운 삶.




전시실들은 마치 미로처럼 얽혀 있어서 찾기가 복잡했다.


한 방과 연결된 문이 매우 많았다.


대부분은 중세시대 기독교 작품들이었는데,


조금 현대시기로 오면 베르메르의 작품도 있었고 카라밧지오, 모네, 마네, 고흐, 고갱 등 유명한 작가 작품도 많았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터너의 작품들과 고흐의 해바라기였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고흐의 그림 몇 점이 있었는데, 책에서는 흔히 봤지만 밀밭을 표현한 방식에 놀랐다.


빅벤을 볼 때 느낀 것 같이, 책이나 그림에서 볼 때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2D로는 질감을 느낄 수 없으니까. 



역시나 촌년인지, 미술책에서나 보던  유명한 작품들을 마주하고 있자니 이게 정말 현실인지 실감이 안 났다.


정말로 너무 실제같지가 않아서, 그림 앞에 한참을 서 있었던 것 같다.







끼야약! 


진짜 뽐뿌 돋는 기념품 샵.. 


우리나라 기념품 샵들이 이렇다면 행복할지 돈 다 털려서 징징거릴지 잘 모르겠다.


다 쓸어담아오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서..


그냥 구경으로 그쳐야 했다.


정말 갖고 싶은 게 무지 많았지만 친구들 줄 립밤이랑 해바라기 팔찌 정도를 사왔던 것 같다.



















그리고 방문한 내셔널 포트레이트 갤러리.


볼 게 별로 없어서 그냥 조금 둘러보고 나왔다.


기억에 남는 건 다이애나 비와 에이미 와인하우스, 그리고 비비안 리 정도.


에이미 사랑해요.




그리고 나와서는 아마 맥도날드를 찾아가 자전거 자물쇠를 사러 피카딜리 서커스에 갔던 것 같다.


전날 아래 침대에서 잤던 언니가 거기서 자전거 체인을 본 것 같다고 해서다. 


곧 야간 열차도 이용하게 될 텐데, 짐이 털리는 게 무서웠다.


그 언니 말대로 스포츠용품 점에 갔지만 체인은 없었다.


Rapha라는 가게로 갔고 그 가게에 가서 물어보니 또 다른 가게를 알려줬다.


락커와 붙어 있는 체인은 너무 비싸서, 자물쇠는 나중에 따로 살 요량으로 그냥 체인만 사왔다.






피카딜리 서커스 근처에서 배고파서 사먹은 피자.


바로 앞에 광장이 있었는데 


광장에서는 싸이의 강남스타일 노래를 틀어놓고 남정네들 몇이 춤을 추고 있었다.


이 맛대가리 없는 피자를 먹으며 비둘기와 나란히 앉아 그걸 구경했다.



그 다음엔 안경을 가지러 다시 민박에 갔다.


눈이 아주 나쁘지는 않지만 3층 좌석이니 안경이 필요할 것 같았다.


민박에 가서 자전거 체인과 가방을 놓고 다시 빅토리아 역으로 갔다.


민박 이모가 빌리 엘리엇의 줄거리를 대충 설명해 주었다.





이쯤 되어 나의 지도보기 능력치가 정상인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한 듯하다.


예약해둔 뮤지컬 티켓 시간에 맞춰 극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있었던 차이나 타운 근처 풍경이다.










그리고 이 때 본 '쓰릴러' 간판.


또 한번 깨닫게 되는 나의 바보짓 때문에(?) 덕분에(?) 마지막 날 나는 이 공연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극장 도착!


아슬아슬하게 도착하는 걸 싫어해서 넉넉잡아 1시간 쯤 전인 6시 30분에 갔는데


공연 시작 몇분 전까지는 들여보내주질 않았다. 


옆에 있는 바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술 종류도 팔았지만 왠지 졸릴 것 같아서 고민 끝에 나는 커피를 마셨다.


7시가 넘어가자 1층이 바글바글해졌다.


마시면서 셀카를 찍었는데 찍고난 뒤 사진을 보니 


뒤의 한 아저씨가 "쟨 뭐야.." 이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되어 입장 뒤 착석.


이 때 내 바로 옆자리에 앉은 한 여자사람이 한국분이었다.


아침에 표 끊을 때 봤어요- 하며 내게 말을 붙이길래 같이 이야기를 좀 나눴다.


뭔가, 동행은 이렇게 구하는 건가? 싶어 "야경보러 가실래요?" 하며 친한척을 시전하였으나


장렬히 전사. 


거절당해 조용히 찌그러졌다.








사실 빌리 엘리엇은 영화로도 보지 않은 터라 과연 재밌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이 더 컸다.


내가 취향을 좀 타기도 하고, 게다가 영어로 봐야 하니까.




그러나 극장을 빠져나오며, 보길 잘 했다-는 생각을 했다.


역시 기대가 적어야 만족도가 높나?


민박 이모가 만난 연출가들이 '연출이 최고'라고 했다는데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노동자들 vs 경찰, 그리고 그 사이에 낀 빌리 vs 여자아이들.


그리고 깨알같은 마이클!




노동자들과 경찰이 대치하면서 만들어지는 딱딱함, 경직된 느낌을


아이들의 얇고 맑은 목소리와 해맑은 춤이 상쇄해준다.


내용이 재미있었던 것은 둘째 치고 가장 좋았던 것은 무대 구성이었다.


위로 올라가는 빌리의 다락방 이라든가, 옆으로 뽑으면 나오는 화장실이 인상깊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큰 빌리가 스완 레이크를 추는 장면에서 와이어가 너무 잘 보였다는 정도?


의자 소품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것도 좋았다.




1층에서 봤으면 후회할 뻔 했던 게, 무대를 가로로 세로로 무지 꽉차게 효율적으로 활용해서


훨씬 더 입체적이고, 3층에 있었던 나는 그걸 더 잘 느끼며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본 뮤지컬이 몇 없어서 비교대상이 없긴 하지만.








영국에선 거의 동행이 없었다.


테이트 모던에서 잠시 두 언니와 같이 다녔던 것과, 


마지막 날 미래를 영업해 같이 쓰릴러 보러 간 것만 빼면 


거의 늘 혼자였다.



근데 그래서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민박으로 돌아와서는 길고 긴 일기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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