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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디스 창고/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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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그냥, 판도라 상자 그냥, 판도라 상자 진은영 너의 말이 낡은 소파에서 일어나 세상에서 가장 큰 기지개를 켜는 날이 있었지나의 말이 스텐 프라이팬에서 겹겹이 흩어진 양파처럼 희망의 냄새를 피우며 둥글게 구워지던 날이 있었지 우리의 말이 긴 속눈썹을 열고 부드러운 푸른 오솔길을 보여주던 날이 있었지빨간 스프링의 모가지를 가진 슬픔이 담장 너머로 튀어 오르던 날이,거대한 고깃덩이에서 기름을 떼어다가 미끄러진 도살장의 칼날 같은 말이,너와 내가 아주 모호한 거리에서 만나고 헤어지며 주고받은 말이 있었지 나는 그냥,망가진 몸의 상자로부터 뛰쳐나오는상자에 그려진 무섭고 익살스런 녹색 표정의 마지막 유령이나 되었으면아무 때나, 아무 곳에도 숨길 수 없는 - 2012,
[진은영] 세상의 절반 세상의 절반 진은영 세상의 절반은 붉은 모래나머지는 물 세상의 절반은 사랑나머지는 슬픔 붉은 물이 스민다모래 속으로, 너의 속으로 세상의 절반은 삶나머지는 노래 세상의 절반은 죽은 은빛 갈대나머지는 웃자라는 은빛 갈대 세상의 절반은 노래나머지는 안 들리는 노래 - 2012,
[진은영] 음악 음악 진은영 손바닥 위에 빗물이 죽은 이들의 이름을 가만히 써주는 것 같다너는 부드러운 하느님전원을 끄면부드럽게 흘러가던 환멸이돼지기름처럼 하얗게 응고된다 - 2012,
[진은영] 쓸모없는 이야기 쓸모없는 이야기 진은영 종이펜질문들쓸모없는 거룩함쓸모없는 부끄러움푸른 앵두바람이 부는데그림액자 속의 큰 배 흰 돛너에 대한 감정빈집 유리창을 데우는 햇빛자비로운 기계아무도 오지 않는 무덤가에미칠 듯 향기로운 장미덩굴 가시들아무도 펼치지 않는양피지 책여공들의파업 기사밤과 낮서로 다른 두 밤네가 깊이 잠든 사이의 입맞춤푸른 앵두자본론죽은 향나무숲에 내리는 비너의 두 귀 -2012,
[진은영] 가난한 이의 목구멍에 황금이 손을 넣어 모든 걸 토하게 하는 것 같다초록빛 묽은 토사물 속에 구르는 별들하느님은 가짜 교통사고 환자인 것 같다천사들이 처방해준 약을 한번도 먹지 않은 것 같다푸른 캡슐을 쪼개어 알갱이를 다 쏟아버리는 것 같다 -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무익했다그래서 너는 생각했다 무엇에도 무익하다는 말이과일 속에 박힌 뼈처럼, 혹은 흰 별처럼빛났기 때문에 - 낡은 태양이 창유리에 던지는여섯번무감한 입맞춤그리고 문득일요일이 온다 -
[진은영] 오필리아 오필리아 진은영 모든 사랑은 익사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흰 종이배처럼붉은 물 위를 흘러가며나는 그것을 배웠다 해변으로 떠내려간 심장들이뜨거운 모래 위에 부드러운 점자로 솟아난다어느 눈먼 자의 젖은 손가락을 위해 텅 빈 강바닥을 서성이던 사람들이내게로 와서 먹을 것을 사간다유리와 밀을 절반씩 빻아 만든 빵 - 2012,
[강준만] 대중문화의 겉과 속 대중문화의 겉과 속저자강준만 지음출판사인물과사상사 | 2013-06-28 출간카테고리정치/사회책소개한국인을 위한 최고의 대중문화 입문서가 최신 버전으로 돌아오다!... 재밌게 읽었다. 2013년이니 아무래도 최신 예시들이 실리고 그런 건 아니지만 개유익개유익.대중문화 전반에 나타나는 현상과, 이를 과거 유명한 사람들의 연구와 외국의 사례를 인용하며 슉슉 풀어나가는데 '아하'하며 상식이 풍부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장석남 시집]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저자장석남 지음출판사창비(창작과비평사) | 2001-02-27 출간카테고리시/에세이책소개시인의 네번째 시집. 60여 편의 시를 수록했다. 죽은 꽃나무를... 시는 그림같다. 예전에 미술사학 수업을 들을 때, 대체 이런 그림에서 뭘 느껴야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시를 해석하듯이 읽었다. 이 그림이 시라면 어떻게 읽힐까. 마지막 시 해설 부분에서 최하림 시인은 장석남과 비교하여 김환기를 언급했는데, 참 적절한 느낌의 비유다. 달 바다 새 꽃 .. 여러 이미지가 등장하지만 그 사이에 여백이 있다. 바다와 강 사이에는 여러 개의 발자국이 있고 꽃이 떨어져내린 길의 끝에는 땅과 물이 있다. '연하다'는 표현이 맘에 든다. 포근하고 어쩐지 봄과 같다.
[장석남] 새벽달과 신발장 새벽달과 신발장 장석남 신발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나는조그만 여울물 위에 뜬 꽃잎 같은그런 울음도 떠올려보는 것이다이런 출출한 깊은 밤에는 등나무 보라꽃비저벅저벅 밟았던 어느날 오후의조그만 신발도거기 두고 온 크고 작은 몇 개 발자국도옹크리고 있는 것이다 아이 젖니처럼 뜬 새벽달아래 -2001,
[장석남] 水墨 정원 9 ㅡ 번짐 水墨 정원 9 ㅡ 번짐 장석남 번짐,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여름이 되고너는 내게로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번짐,번져야 살지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번짐,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또 한번ㅡ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번짐,번져야 사랑이지산기슭의 오두막 한채 번져서봄 나비 한마리 날아온다 -2001,